본문 바로가기

Design Trend/사람들

압정으로 '바늘구멍' 뚫었다… 한국 디자이너 제품 MoMA(뉴욕현대미술관) 입성

뉴욕현대미술관 디자인 스토어서 작품 판매… 디자이너 오세환씨

▲ 오세환씨

지금 국내 디자인 현실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파는 격
디자이너는 디자인에 전념하고 생산·유통·마케팅은
따로 맡는 미국식 시스템 부러워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전시관이 아니라 디자인(제품) 스토어라는 말이 있다. 세계 최고 권위 미술관 가운데 하나인 MoM A는 순수미술뿐 아니라 건축, 디자인까지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 선구자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 곳이다.

이곳 디자인 스토어에서는 필립 스탁, 카림 라시드 등 세계 최정상급 디자이너들과 떠오르는 신진 디자이너들의 제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미술관이 엄격한 심사 과정을 거쳐 상품을 선정하기 때문에 일단 어느 디자이너의 제품이 이곳에서 팔린다는 건 MoMA로부터 그만한 예술적·디자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뜻이 된다. 세계적 디자이너로 도약할 수 있는 '인증서'인 셈이다.

디자이너 오세환(40)씨는 지난 4월 바로 그 '인증서'를 손에 쥐었다. 그의 작품인 클립·압정 홀더 '터틀'이 MoMA 디자인 스토어 제품으로 채택돼 판매되기 시작한 것이다. 터틀은 현재 개당 16달러(약 1만7000원)에 팔리고 있다. 오씨는 판매 수량에 따른 로열티를 받게 된다. 한 디자인계 인사는 "MoMA는 제품가격의 5~7% 정도를 로열티로 작가에게 주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 새들을 위한 쉼터이자 모이통인‘송 버드’. 모이를 쪼는 새의 움직임에 따라 플라스틱 통이 흔들리면 안에 들어있는 모이가 조금씩 나온다.

27일 서울 정릉동 자택에서 오씨를 만났다. 오씨는 원래 2007년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영 앤드 디자인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는 가구 디자이너이다. 오씨가 전공이 아닌 문구 소품을 MoMA에 내게 된 건 '다양한 소재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는 "플라스틱, 유리 같은 소재에 흥미를 느끼다 보니 촛대, 조명부터 새 모이통까지 안 만들어본 게 없다"고 했다.

오씨에게 MoMA 진출 길을 터준 터틀은 기존 클립 홀더와의 '작은 차이'가 돋보이는 제품이다. 거북이 등딱지를 닮은 플라스틱 껍데기 안에 자석을 넣었다. 오씨는 "자석을 사용하는 홀더 대부분이 압정이나 클립을 겉에 붙이게 돼 있다"며 "그러나 그런 제품들은 어린이들이 손을 다칠 수도 있어 해결 방안을 찾다가 거북 등딱지 모양의 외피 안쪽에 클립·압정이 모이게 하는 걸 생각해냈다"고 했다.
 

▲ MoMA가 디자인 스토어 제품으로 채택한 거북이 모양 클립·압정홀더‘터틀’(왼쪽 위). 유리관을 사용해 만든 오일 램프(왼쪽 아래)는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원리를 이용해 색깔이 있는 부분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2007년‘영 앤드 디자인상’수상작인 플러그드 퍼니쳐(사진 오른쪽). 디자이너 김은영씨와 공동 제작했다. /오세환 제공

MoMA의 심사를 통과하는 과정은 "결코 간단치 않았다"고 한다. 오씨는 "플라스틱의 두께, 강도 등을 달리한 시제품만 세 번 뉴욕에 보냈다"고 했다. "MoMA는 안에 들어가는 자석의 자력(磁力)까지도 꼼꼼하게 따졌고, 결국 자석을 사용할 때 클립이 몇 개나 붙는지 여러 경우의 수를 실험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 뉴욕으로 보내야 했다"고 한다. 그는 "최종 채택될 때까지 미술관 내부에서 7번의 회의를 거쳤다고 들었다"고 덧붙였다.

오씨는 이런 경험을 하면서 "디자이너는 디자인에만 신경 쓰고, 일단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제품의 생산과 유통·마케팅 등은 미술관에서 전담하는 MoMA의 시스템이 부러웠다"고 했다. "디자인 제품을 상품화하려면 디자이너가 생산은 물론 유통까지 직접 나서야 하는 국내 현실에 비하면 훨씬 유리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하나뿐인 '작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면 상품화는 중요하다"고 했다. "많은 사람이 세심하게 디자인된 물건을 쉽게 접하려면 대량 생산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오씨는 "지금 국내 디자인 현실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단계"라며 "생산에까지 뛰어드는 디자이너들 덕에 잘 디자인된 제품이 많이 늘긴 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디자인 선진국이요? 스타 디자이너 몇 명 나온다고 되는 게 아니죠. 평소에 흔히 쓰는 물건에도 디자인이 세심하게 배어 있어야 선진국이에요. 그러려면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가 제품으로 현실화될 수 있는 여건이 필요합니다."


채민기 기자 chaepline@chosun.com

기사입력 : 2011.07.29 03:13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