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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시각

이 손으로 세상을 바꿉니다… ‘광고 천재’ 이제석, 경찰·대구 육상대회에 꽂힌 이유

지난달 27일 동대구역, 기차에서 내려 역사로 올라가니 유니폼을 입은 이들이 구호에 맞춰 요란하게 인사를 한다. 나가는 곳에는 파란색 옷의 사람들이 유인물을 나눠준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알리는 내용인 줄은 몰랐다. 동대구역사를 나가자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도와 인도를 나눠놓은 펜스 위로 허들 경기하는 선수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길 건너에서는 가로등을 붙잡은 선수가 장대높이뛰기를 하고, 담장은 높이뛰기로 넘는다. ‘아, 대구에서 육상대회가 열리지.’ 이들 광고판은 백 마디 말보다 더 직관적으로 이 도시가 무엇에 들떠 있는지 알려준다.

이 광고판을 만든 이는 이제석(29)씨다. 세계 3대 광고제 중 하나인 원쇼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각종 해외 유명 광고제에서 50여개의 상을 휩쓸면서 ‘광고천재’로 유명해졌고 현재 자신의 이름을 딴 이제석광고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다. 총부리가 총 쏘는 군인 자신의 뒤통수를 노리는 사진에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카피를 곁들인 반전(反戰) 공익광고는 해외에서 더 유명하다.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보수작업 당시 ‘탈의 중’이라고 적힌 시설물을 설치, 시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다음 날 이 대표를 홍대 근처에서 만났다. 그는 ‘한번을 봐도 평생 머리에 남는 광고를 만들고, 광고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패기만만한 광고장이였다. 그는 요즘 경찰과 대구의 이미지를 바꿔놓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경찰, 짭새에서 영웅으로

경찰관들, 참 고생한다. 외국인들이 “한국 치안이 최고”라고 손가락을 치켜드는 거 보면 우리 경찰은 일은 잘한다. 문제는 사람들 인식 속의 경찰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점이다. 잘해야 본전이고 가끔 터지는 경찰 비리, 총기 오발 뉴스에 “짭새가 원래 그렇지”라는 등 원색적 비난이 쏟아진다. 경찰청도 답답했는지 이 대표를 경찰청 홍보자문위원으로 위촉, 경찰 공익광고 제작 등을 맡겼다. 이 대표는 “도대체 경찰이 칭찬을 들어본 게 언제입니까. 경찰은 당근은 없고 채찍으로 얻어맞기만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대표가 현장의 일선 경찰을 두루 만나면서 진단한 문제점은 소통부재였다. ‘우리가 일을 잘하면 남들이 알아주겠지. 우리는 할 일만 하면 된다. 왜 대중들을 신경 쓰느냐’는 생각을 하는 경찰들이 적지 않았다. 영화 속이라면 이런 형사들이 멋있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선 정반대다. 일반인들이 경찰과 마주치는 순간은 대개 생애 최악의 상황일 텐데 이런 사람들에게 소통불통의 경찰은 ‘권위적인 짭새’로 보이지 않을까?

“대중과 오해 없이 소통하려면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이 대표는 상징적 차원에서 거수 경례 모양을 바꾸자고 제안했단다. 일반적인 거수경례에서 손을 귀 뒤로 조금 더 내려 귀 기울여 듣는 듯한 포즈로 하자는 것. 그는 또 경찰이 고생하는 것을 알리는 광고 시안도 공개했다. 경찰에 대한 나쁜 인식을 무시한 채 그들이 고생한다고 떠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다. 대중의 인식을 바꾸려면 고생하는 모습을 구차하지 않게, 동시에 유머러스하게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경찰서는 술집이 아닙니다’라는 광고카피가 탄생했다. 밤마다 술주정뱅이와 다툼이 벌어지는 지구대의 현실과 그로 인한 경찰의 애환을 애교스럽게 드러낸 것이다.

광고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도 만들려고 한다. “경찰은 강하고 딱딱한, 그래서 다가가기 힘든 존재지만 교실 뒷줄에 앉아서 삥 뜯는 깡패와 다릅니다.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영웅의 이미지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민을 구해내고, 길 잃은 할머니를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사례들을 발굴해 광고로 표현할 작정이다. 사람들이 배트맨, 슈퍼맨에 열광하듯, 같은 일을 하는 경찰에게도 호감을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껏 경찰이 해왔던 포돌이는? 그냥 경찰을 만만하게 보이도록 했을 따름이다.

대구, 무뚝뚝하지만 속은 뜨거운 사나이

“밥은? 아는(아이는)? 자자.” 경상도 사내가 집에 들어오면 아내에게 한다는 말 세 마디다. 짧다 못해 퉁명스럽다. 대구 출신 이 대표는 이런 무뚝뚝한 경상도 스타일이 광고인에 어울린다고 했다. “(경상도 사내의 유머는) 긴 말이 필요 없는 궁극의 압축이죠. 광고도 말을 압축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작업입니다.”

이 대표는 대구시의 브랜드를 바꾸는 일도 하고 있다. 대구 이미지는 말이 없고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의 이미지와 비슷하다. 미련하고 답답하게 비칠 때가 많다. 그런데 현재 대구의 슬로건은 ‘컬러풀(colorful) 대구’다. ‘다양한 색깔, 다채로움을 의미한다. 젊고 밝고 멋지고 화려하고 활기찬 도시 이미지를 표현했다’고 시청 홈페이지는 설명한다. 아마도 섬유의 도시, 패션 육성의 도시라는 점에서 이런 슬로건을 만들었나본데 대구의 실제 이미지와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게 이 대표의 판단이다.

이 대표는 관점을 바꾼다. “미련하고 무뚝뚝한 게 부끄러운 건 아니잖아요. 뺀질거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뭔가 의리 같은 것도 느껴지고.” 믿을 만하고 듬직하고 성실하고 배신을 모르는 캐릭터. 그는 애써 무뚝뚝함을 감추고 다른 이미지로 치장하는 대신 무뚝뚝함을 더 드러내고 강화하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대구의 KTX역에다 환영 간판을 만들 예정인데 들어갈 표현은 ‘어서 오이소, 밥은 뭇는교?(어서 오세요, 밥은 드셨습니까?)’다. 글씨체는 고딕이나 궁서체로, 글씨는 아주 크게, 색깔은 그냥 검은색으로 통일. 단순하게 큰 글씨로 적힌 간판을 상상해 보라. ‘안녕하세요 대구입니다. 환영합니다’보다 박력 있으면서 웃기지 않은가?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관련 작업의 기획 의도 역시 대구를 ‘무뚝뚝하지만 센스 있는 도시’로 보이기 위한 것이다. 광고판에는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다. “대구를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계획이 (내 머리 속에) 서 있다. 죽기 전까지 계획대로 바꿔놓을 작정이다.” 그의 말에 자신감이 넘친다.

광고천재의 공익광고론

“나는 인식론자입니다. 인식만 바꾸면 다 됩니다.” 그는 현재 대학원에서 디자인을 공부하면서 기호학, 철학 등 인식론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다. 저출산 문제도 싱글은 멋있고 집안일은 허드렛일이라는 인식, 가족과 효도가 성과, 경제적 요소보다 뒷전이라고 생각하는 인식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경제적으로 힘들다고요? 그럼 더 힘들었던 6·25 때는 애 안 낳았습니까?”

그에게 있어 광고는 인식의 세계를 만들고, 인식을 파는 작업이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치’다. 돈이 최우선이라면 병원은 돈 없는 환자를 쫓아내고, 공터의 문화재를 밀어버리고 건물을 짓는 게 더 이익이다. 하지만 물 한 병의 값이 1000원이라고 해서 물이 명품 가방보다 덜 가치 있는 존재는 아니다. 그는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질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위트가 담긴 광고로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를 따져 묻는다.

이 대표에겐 공익광고가 주제, 소재를 가리지 않는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계단에다 에베레스트 산을 그린 광고로 ‘장애인에겐 계단이 히말라야 고봉과 다를 바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검은 연기가 나오는 낡은 굴뚝. 굴뚝은 권총의 총신이다. 매연을 포연으로 처리해 매년 6만명이 대기오염으로 사망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한다.

현재 이제석광고연구소의 공익광고와 상업광고 비율은 7대 3 정도다. 상업광고는 물질적 보상이 크지만 보람이 없어 싫단다. 일부 광고주들이 ‘제품이 잘 팔리면 좋은 제품을 만든 덕분, 안 팔리면 광고 탓’을 하기 때문이다. 창의력을 발휘하기보다 유명 모델을 쓴 평범한 광고를 선호하는 풍토도 마음에 안 든다.

공익광고에선 물질적 대가는 적은 대신 광고주들의 만족도가 높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최근 한 단체는 광고 대가로 돈 대신 USB 8개를 줬고, 어떤 단체는 피자를 시켜줬단다. “내가 손해 보더라도 중요한 건 마음이에요.” 그렇다면 돈은 중요하지 않나? “물론 돈이 중요하죠. 저 돈 좋아해요. 돈 벌려고 이것저것 생각한 기획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돈을 보기 전에 가치를 봐야 한다는 것이 제 신조고, 대중에게 전하고 싶은 복음입니다.” 그는 가진 게 별로 없다고 했다. 재킷도 한 벌뿐이고 운동화, 구두 각각 한 켤레가 전부란다. “대신 양말과 빤스는 많아요.”

공익, 가치를 강조하는데 만약 초등학생이 일을 의뢰해도 해 주겠는가? “바빠서 의뢰 들어오는 일을 다 할 수 없지만 조언은 해 줍니다.” 어느 여고생이 ‘반 친구들이 급식 많이 남기는데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어왔다. “급식을 남기면 벌금내서 결식아동을 돕도록 하고, 인식을 바꾸기 위해 캠페인 포스터 붙여두라고 했어요. 포스터 아이디어도 조언해줬고요.”

공익광고를 좋아하는 이 남자의 목표는 ‘돈으로 만들 수 없는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도 만들 수 없는 그런 광고. 이 대표가 가치, 인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20대인데 흰머리가 꽤 많다. “머리 아플 일이 많아요. 보통 정도만 해도 되는데 완벽을 추구하다 보니까.” 광고에 미친 남자가 바꿀 세상이 기대된다.

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

| 기사입력 2011-09-01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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