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esign Trend/환경

공공디자인 클리닉 <22>

권영걸 교수의 공공디자인 클리닉 <22> 소화전, 눈에 잘 띄고 사용법 알기 쉽고

공공건축물의 안전설계 기준은 높아졌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이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해 발생하는 재난사고는 증가하고 있습니다. 국가재난정보센터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재난사고는 교통사고이며 그 다음이 화재입니다. 특히 화재는 대부분 미숙한 초기 대응으로 인해 피해가 커집니다.

세로로 ‘소화전’이라고 쓰고, 설명이 복잡한 현재 소화전(왼쪽). 가로 글씨로 ‘소화전’이라고 적고, 이해하기 쉽게 사용 설명을 그림문자로 표현한 개선안(가운데·오른쪽). 
 
‘소방시설 설치 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은 건물 내부에 소화전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화재 발생 시 피해 범위를 줄이기 위한 것입니다. 또 ‘옥내 소화전 설비의 화재 안전기준’을 통해 소화전 장치 및 배관 사양, 함(函)의 설치 간격과 높이(수평거리 25m 이내 지면으로부터 높이 0.5m에서 1m 이내) 등 구체적인 기준을 지키도록 하고 있습니다. 표시등의 형식, 색, 위치(부착 면으로부터 15도 이상의 범위에서, 부착 지점으로부터 10m 이내 어느 곳에서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적색등)에 대한 기준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용법을 전달하는 데는 무심합니다. 강판함에 세로쓰기로 ‘소화전’이라고 쓰여 있을 뿐 구체적인 기능과 작동 방식을 알기 어렵습니다. 함의 외부 또는 내부에 사용법이 부착돼 있지만 그마저 ‘관창’ ‘화점’ 등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없고 상용되지 않는 용어들을 쓰고 있습니다. 분초를 다투는 위급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디자이너 김경선은 소화전의 난해한 사용법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개선했습니다.

법률이 색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각적 각성 효과가 큰 빨간색 타입과 공공건축물의 벽이 대개 흰색임을 감안해 밝은 회색 타입을 제안합니다. 소화전이라는 글씨도 자연스럽고 보편화된 가로쓰기로 바꾸었습니다. 사용법은 기존의 긴 설명문 대신 문자 수를 최소화했습니다. 4단계의 픽토그램(그림문자)으로 간략히 표현했습니다.

미국 컬럼비아대 로빈 거슨 교수가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 의하면 비상시 사람들은 새로 익혀야 하는 정보보다 평소 머릿속에 있는 정보에 의존해 행동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즉 위기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에 요구되는 행동이 경험을 통해 사전에 깊이 각인돼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 방재시설인 소화전도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소 학습될 수 있어야 하며 사람이 긴급 상황에서 보이는 본능적인 행태에 맞춰 사용하기 쉽게 디자인돼야 합니다.

권영걸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중앙일보] 2010.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