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걸 교수의 공공디자인 클리닉 <11> 무심히 걷는 길, 이야기 있는 공간으로
풍광 좋은 장소 맞은 편에는 으레 전망시설이 설치됩니다. 더 좋은 시점을 확보하기 위해 구조물을 세우기도 하고 건축물을 짓기도 합니다. 지형 특성상 전망 지점이 명확한 경우 간단한 시설물을 설치해 경치를 바라보게 합니다. 최근 도시마다 경관을 관광자원화하고자 스카이라인이나 야경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나 포토존을 만들기도 합니다. 서울 삼청동은 인왕산과 북악산을 등지고 있는, 자연과 도시가 만나는 지역입니다. 그러나 삼청동 화개길에서 바라보는 인왕산은 안전펜스에 가로막혀 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길은 표정도 없고, 아무 말도 걸어오지 않습니다(사진1).
국보 216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조선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걸출한 진경산수입니다. 디자이너 이상환은 이 천재 화가의 시선을 추적해 삼청동 화개길에 전망시설을 제안했습니다. 축대 길을 따라 가다가 앞으로 돌출한 전망대에서 인왕산과 삼청동 일대를 한눈에 바라봅니다. 시야를 가로막던 철재 펜스 대신 투명한 강화유리로 된 펜스를 설치해 전망은 시원하게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전망대는 가급적 덜 느껴지게 했습니다. 펜스에는 바람에 날려 온 듯, 인왕제색도가 재현돼 있습니다. 시민들은 250여 년 전 서울문화인, 겸재와 동일한 경치를 공유하며 교감하게 됩니다. 겸재 산수화는 실경을 담은 그림이기에 감동은 더욱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외팔보(cantilever) 구조의 전망대 하부는 한옥 처마의 서까래를 은유한 형태로 돼 있어 한옥에서 거주하는 아래 동네 주민들에게 생경한 풍경이 되지 않도록 했습니다(그림2).
모든 도시와 마을은 보물찾기 하듯, 지역의 숨은 이야기 찾기에 나서야 합니다. 이 소중한 문화자산을 통해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길이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합니다. 겉보기에는 전망대 하나 만드는 일이지만, 실은 도시의 장소로 하여금 시공간적인 맥락을 갖게 하는 일입니다. 도시는 이러한 노력이 하나 둘 쌓여 품위 있는 문화도시로 나아가게 됩니다.
권영걸 서울대 교수·한국공공디자인학회 회장
[중앙일보] 2009.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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