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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디자인은 파는 게 아니라 주는거죠

디자인 기부 나선 밥장

완주 도서관·어린이대공원역, 아파트 벽 동네 아이들 얼굴… 난 업자가 아니라 작가, 차비만 받고도 그려줘
기부받는 사람도 준비가 돼야… 막무가내 공짜 요청은 사절
"딩동딩동~" 아파트 초인종이 줄기차게 울렸다. 놀라 문을 열자 동네 꼬마 수십 명이 시위하듯 버티고 섰다. "아저씨! 내 얼굴도 벽에 그려달라고요." "저도요, 저도요!"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그도 몰랐다.

그래픽 디자이너 밥장(본명 장석원·41)이 올 초 자신이 살던 서울 은평구 구산동의 한 아파트에 벽화를 그리기로 했을 때 일이다. 그는 아파트 주민대표인 어머니를 도와 뭔가 동네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아이들이 즐겨 찾는 삭막한 아파트 구석 벽에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별 생각 없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재혁이라는 동네 꼬마가 다가왔다. "아저씨, 내 얼굴 그려줘요." 장난삼아 녀석 얼굴을 그리고 옆에 이름을 썼다. 그걸 본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그의 집에 몰려온 것이었다. 결국 아파트 벽면은 동네 어린이 45명의 얼굴로 채워졌다.

▲ ‘디자인 기부’를 하고 있는 밥장. 뒤로 보이는 공사판 그림은 서울 해성여고 학생들과 함께 작업한 공사장 가림막이다. /이덕훈 기자 dhlee@chosun.com


"'스타 작가'가 되는 것보다 '동네 스타'가 더 의미있다고 생각해요." 지난주 서울 전농동 해성여고 앞에서 만난 밥장은 "인생 역전을 안겨준 디자인을 이제 이웃에 기부하고 싶다"고 했다. 이마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가득하고 온몸은 페인트투성이였다. 한창 해성여고 학생들과 함께 학교 주변 담장에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 역시 '디자인 기부'의 일환이었다.

밥장은 만 10년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가 미술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채 2005년 일러스트 디자이너가 돼 화제를 모은 인물. 펜으로 꼬물꼬물 탱화처럼 그린 듯한 그림 스타일이 소프트한 이미지를 원하는 기업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져 3~4년 만에 일약 스타 작가가 됐다.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영등포점, 할리스 커피, KB국민카드 등 기업과 일하며 매장 벽화와 광고 일러스트를 작업했다.
 

▲ 삭막한 아파트 벽면에 웃음이 하나둘 피어올랐다. 밥장이 자신의 아파트에 사는 동네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씩 그리고 이름을 써서 완성한 벽화. 아이들이 자기 얼굴을 찾아 사진을 찍고 있다.

그는 최근 가속도가 붙어 질주하는 자신의 인생에 제동을 걸었다. "고객과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그들이 나를 '디자인을 파는 기계'로 대하는 것 같더라고요. 작가가 아니라 업자(業者)로 전락한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생겼어요." 삭막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진짜 의미있는 디자인'을 찾아 나선 길이 '디자인 봉사'였다.

먼저 찾은 곳은 지방의 작은 도서관이었다. 한 달에 스무권은 꼭 읽는 '책 벌레'로서 자연스러운 발걸음이었다. 농어촌이나 저소득층 지역에 들어서는 작은 도서관에 일단 기부 참여를 신청했다. 2009년 처음으로 전북 완주 지역의 작은 도서관 2군데에 벽화를 그렸다. 어린이들이 책 읽는 공간에 호기심을 갖도록 온갖 상상력을 동원했다. 계단 밑에 나비를 그리고 화장실엔 도마뱀이 뛰어나오는 장면을 연출했다. 완주 지역에 사는 이주 여성들이 운영하는 다문화 카페 벽화도 그렸다. 이주 여성들이 사연 많은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밥장이 마무리 붓질로 완성했다.

얼마 전 완공된 서울 지하철 7호선 어린이대공원역 한 벽면은 로봇과 천사로 장식했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아이들이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수고비는 차비 명목으로 서울시 쪽에서 준 5만원이 전부. 그마저도 아직 입금이 안 됐다고.
 

▲ 이주 여성들이 운영하는 완주 다문화 카페 벽면을 장식한 밥장의 그림. 아기자기한 천사와 로봇 캐릭터들이 이주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을 녹여줄 것만 같다.

때로 그의 그림은 사회의 폐부를 에둘러 건드린다. 어린이재단 성폭력예방 캠페인 일러스트가 대표적이다. 로봇이 꼬마 조종사를 지키는 듯한 모습으로 어린이 성폭행 예방을 표현했다. 밥장은 "무거운 주제를 무겁게만 다루면 사람들이 외면하게 된다"며 "어른들의 책임감을 직설적으로 강요하기보다는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부드럽게 호소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의 디자인 기부는 곧 네팔로 뻗어갈 예정이다. 이달 중순 한 NGO와 함께 네팔에 가서 학교 벽화를 그릴 예정이다.

선행이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주위의 격려도 늘었다. 그는 쑥스러운 듯 "선의의 색안경은 거둬달라"며 "내 이야기가 미화되는 건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꽤 현실적인 설명이 이어졌다. "디자인 기부가 꼭 '남을 위한 일'만은 아니에요. 내 그림의 가치를 알리고 사람들과 소통하다 보면 결국 '나를 위한 길'이 돼요. 기부가 마케팅이 되기도 하지요."

디자인 봉사를 하면서 그는 "간혹 기부받는 이들이 준비가 안 된 경우를 보게 된다"고 꼬집었다. 그는 "기부의 전제 조건은 내 그림을 존중해주느냐와 프로젝트가 가치를 지니냐는 것"이라며 "막무가내 공짜 기부 요청은 절대 사절"이라고 했다.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기사입력 : 2011.09.07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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