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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세계무대 휩쓸지만… 한국디자인 아직 없다

80차례 한국 찾은 '지한파' 비그만 iF회장 솔직한 평가
국가브랜드, 기업이 만들어 - 견고하고 고급스런 獨이미지, BMW·벤츠가 이끌어낸 것
日하면 정교… 소니있어 가능 한국엔 이런 기업 있나?
기업들 눈앞의 숫자에 연연 - 디자인도 실적향상 요소로 봐 창의적 인재 뽑아 제대로 못 써

최근 한국 기업과 학생들이 독일의 'iF 디자인상'과 '레드닷(Reddot) 디자인상', 미국 'IDAE상' 등 세계 3대 디자인상을 휩쓸며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디자인 파워를 알리고 있다. 과연 우리가 이런 성과에 들떠 있는 만큼 세계 디자인계도 한국의 디자인을 높이 평가하고 있을까.

한국을 방문한 랄프 비그만(Wiegmann·54) iF 회장은 "한국의 디자인 수준이 많이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아직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를 향상시키기엔 부족하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2000년부터 iF를 이끈 비그만 회장은 국제 디자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파워맨 중 한 사람이다. 한국을 80여 차례 방문한 대표적 지한파(知韓派)이기도 하다. "서울에 오면 다른 어떤 유럽 도시보다도 마음이 편해진다"는 그를 22일 만나 한국 디자인에 대한 솔직한 의견을 물었다.

―그동안 한국의 디자인 수준이 어떻게 변화했다고 보는가.

"16년 전 내가 iF에서 일하기 시작할 때가 삼성과 LG가 세계 디자인상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때 그들의 디자인 수준은 지금의 중국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들 기업의 수준은 엄청나다. 큰 기업뿐만 아니라 웅진 같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회사도 디자인에 매우 신경 쓴다."

―한국이 디자인 분야에서 빠른 성과를 올린 동력은 무엇일까.

"내가 만난 한국 사람은 경쟁을 즐기고 꼭 1등이 되고 싶어한다. 디자인 영역에서도 이런 '1등 정신'이 유효했다고 본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하는 한국 대기업들은 1등이 되기 위해 디자인을 몰아붙였다. 이제 그 결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애플' 같은 기업에 비해 여전히 한국 제품의 디자인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애플은 정말 예외적인 경우다. 스티브 잡스와 조너선 아이브, 디자인을 천재적으로 활용하는 이 두 사람이 있어 애플이라는 창의적 브랜드를 만들 수 있었다. 애플은 제품군이 단순해 자신의 디자인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구조이지만 삼성·LG는 냉장고부터 3DTV까지 만들어 내는 거대 기업이다. 디자인 정체성을 하나로 만들기 어려운 구조이다. 문제는 이런 구조 때문에 한국 기업 전반의 디자인 정체성이 모호해졌다는 점이다." 

▲ "한국의 디자인 정체성요? 아직은 없다고 봐야지요." 22일 본지와 인터뷰를 한 iF 랄프 비그만 회장은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 부족이 한국이라는 국가 브랜드의 무개성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디자인 정체성이 부족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는가.

"한국 기업 관계자를 만나면 하나같이 '올 시즌 디자인 트렌드는 무엇인가' '내년 유행 컬러는 무슨 색인가' 묻는다. 단기적인 유행에 집착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유럽에선 당장 눈앞의 유행이 아니라 장기적인 관점에서 삶의 트렌드 변화를 얘기하려 한다. 독일 기업들이 100년 넘게 산업 디자인 강자로 군림하는 것은 큰 시야에서 실용적인 방법으로 디자인을 제품에 접목했기 때문이다."

―왜 한국 기업이 근시안적으로 디자인에 접근하는 것 같은가.

"의사 결정권자들이 지나치게 '숫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제품 판매) 실적에 집착한다는 말이다. 자연스럽게 디자인보다 마케팅이 우위를 점하게 되고 디자이너가 창의력을 발산할 기회가 적다. 이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무개성(無個性)으로 연결된다."

―한국의 국가 이미지가 '무개성'이라는 의미인가.

"사실 유럽인들에게 한국이란 나라의 이미지는 없다고 보면 된다. 나쁜 것보다는 낫지만…. 한 나라의 이미지는 그 나라 기업이 만든 제품으로 다져진다고 본다. BMW·벤츠의 견고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가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라는 독일의 국가 이미지를 만들었다. 일본의 국가 이미지 역시 소니·파나소닉 등 정교한 일본 제품의 이미지에서 나온 것이다."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한국 기업들이 있지 않은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적다. 유럽인에게 일본 기업 10개를 대보라고 하면 대부분 다 채울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삼성·LG 정도? 한국을 좀 더 안다면 현대· 기아를 더 말하는 정도? 한국 정부는 디자인 전시와 이벤트에 돈을 많이 쏟아 붓는다. 그보다는 더 많은 한국 기업이 국제무대에서 성과를 이루도록 도와주는 것이 국가 브랜드를 만드는 데 효과적이다."

☞iF(international Forum Design Gmbh)

1953년 독일 하노버에서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디자인 진흥 기관. 정부 예산이나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대부분의 디자인 기관과 달리 민간자본에 의해 운영된다. 해마다 제품, 커뮤니케이션, 머티리얼 등의 분야로 나눠 ‘iF 디자인상’을 수여한다.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기사입력 : 2011.07.26 03:10 / 수정 : 2011.07.26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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