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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영화를 그리는 남자들

아저씨·고지전 등 포스터 디자인… '브루더' 박시영·정규혁 대표
배우 표정 바꾸기, 몸 뗐다 붙이기… 그래픽으로 머리 심기는 기본
포스터용 사진 촬영 땐 배우끼리 더 돋보이려고 기싸움도

"영화를 '종합 예술'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영화만 그런 게 아니에요. 포스터도 영화 못지않은 종합 예술이죠."

영화의 러닝타임은 2시간 정도, 예고편은 보통 30초 내외다. 포스터에 주어지는 시간은 이보다 훨씬 짧다. 스쳐 지나는 순간에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 영화의 느낌을 한 장에 모두 담기 위해 사진, 그래픽, 일러스트, 타이포그래피(활자 서체 배열) 등 디자인의 다양한 영역이 총동원된다.

'브루더(Bruder)'는 국내의 대표적인 영화 포스터 전문 디자인 스튜디오다. 대표 2명을 포함한 디자이너 4명으로 규모는 작다. 하지만 '아저씨' '전우치' '의형제' 등 지난해 한국영화 흥행 1∼3위 작품의 포스터가 모두 여기서 나왔다. 20일 서울 서교동 스튜디오에서 만난 박시영(34), 정규혁(29) 대표는 "포스터는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영화의 '대표 비주얼'"이라고 했다.

"포스터는 관객들에게 영화에 대한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다. 표 값을 내도 되겠다는 믿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영화의 느낌을 최대한 압축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은 공력이 들어간다. 배우의 표정을 수정하거나 머리숱이 적은 곳에 그래픽으로 머리를 '심는' 건 기본이다. 액션영화 주연배우가 역동적인 동작과 강렬한 느낌을 표현하지 못하면 액션 전문 대역배우를 동원해 사진을 따로 찍어 몸만 합성하기도 한다.

"오늘 개봉한 '고지전' 포스터에서는 배우 손가락을 다른 사진에서 오려다 붙였어요. 역할은 어린 소년병인데 사진을 찍어 보니 손이 너무 투박한 거예요. 전장(戰場)에 갓 나온 소년 느낌을 주려고 다른 사람의 더 여린 손 사진을 썼죠."

▲ 자신들이 만든 영화 포스터를 배경으로 앉은 디자이너 정규혁(왼쪽)·박시영씨. 영화보다 더 인상적인 영화 포스터를 만드는 게 이들의 꿈이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정 대표는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 오래 기억에 남는 포스터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영화를 본 뒤에도 사람들은 포스터의 이미지를 기억해요. 달을 배경으로 자전거가 날아가는 'ET'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죠. 더구나 요즘은 블로그 같은 곳에 감상평을 올릴 때 포스터 이미지가 함께 올라가요.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 영화의 아이콘이 되는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야 합니다."

이들의 작업 무대는 인터넷의 명함 크기만 한 포스터부터 건물 외벽에 걸리는 대형 현수막까지 다양하다. 영화 한 편당 건물 외벽용으로만 100여 종류의 사이즈를 만든다. 10m를 훨씬 넘는 대형 현수막에 출력하면 미세한 실수까지 금방 드러나기 때문에 그만큼 신경 써서 작업해야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의 포스터 제작 환경은 열악했다고 한다. 충무로엔 "포스터에 노란색을 쓰면 영화가 '황' 된다" "배우 뒷모습을 쓰면 관객이 등을 돌린다" 같은 미신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정도까진 아니지만 여전히 여러 제약 조건이 붙는다. 모노톤(단색조)을 금기시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 박 대표는 "배급사에서는 일단 눈에 띄어야 하기 때문에 다채로운 색채를 강조한다"며 "흑백이나 단색조로 표현된 포스터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포스터용 사진을 찍는 현장에서 배우들의 '기싸움'도 벌어진다. 여러 명이 함께 등장하는 포스터에서 서로 돋보이기 위한 경쟁이다. "우리 배우가 그래도 저쪽보다는 인기 있지 않으냐"는 식의 소속사 민원(民願)도 어김없이 들어온다. 정 대표는 "감초 역할을 많이 했던 한 조연급 배우는 자기 비중이 적은 촬영에서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고 했다. 그런 배우를 포스터에 담아야 할 때는 그를 많이 배려하는 사진과 그렇지 않은 사진을 모두 찍고 실제는 후자를 쓰는 '요령'도 생겼다고 한다.

브루더는 독일어로 형제라는 뜻이다. 디자이너가 모두 남자들이어서인지 지금껏 액션이나 무거운 드라마를 주로 맡았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로맨틱 코미디 같은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작업을 해보고픈 '소망'이 있다.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는 '마더' '하녀' 정도였어요. 이제는 예쁜 여주인공 나오는 발랄한 영화도 해보고 싶어요. 그런 것도 잘할 수 있다니까요!"

채민기 기자 chaepline@chosun.com

기사입력 : 2011.07.21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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