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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그림들이 액자 속에서 세상 밖으로 걸어나오다.

이이남 작가(사진 위)의 미디어 작품들. 사진 왼쪽부터 ‘09 금강전도’(정선의 ‘금강전도’), ‘신-마릴린 먼로’(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신-키스’(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왼쪽 TV 화면에 있던 나비가 팔랑팔랑 날아가 오른쪽 TV 속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다. 다른 모니터에선 겸재 정선의 1741년 풍경화 ‘장안연월’과 세잔의 1904년작 ‘생 빅투아르 산’이 서서히 겹친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42)의 작품이다. 그의 화두는 다른 시대에 살던 작가들이 다른 재료로 표현한 생각을 현대인의 마음에 담는 작업이다. 액자나 병풍에 갇혀 있던 옛 그림들이 LED TV 모니터 속에서 2~11분 길이의 미디어아트로 환생했다.

지난해 11월 주요 20개국(G20) 회의에서 이이남의 작품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회의장과 정상들의 숙소에 비치된 TV와 아이패드·갤럭시탭 등을 통해 전시됐다. 특히 서울 강남 파크하얏트의 경우 정상들이 객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센서에 의해 자동으로 켜진 TV에 김홍도의 ‘묵죽도’와 모네의 ‘수련’이 오버랩되는 이이남의 작품이 펼쳐졌다. 반응은 뜨거웠다. 즉석에서 작품을 구입하겠다고 청한 이도 있다.

지난달 15일엔 컨버전스 예술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존 라이크만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가 그의 광주 작업실을 방문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에는 전 세계 미술작가 500명의 작품 가격을 순위별로 기록한 ‘아트 프라이스’에 현존 한국작가 8명이 올랐는데, 이 작가가 363위를 차지했다.

광주 조선대와 동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이이남은 1997년 순천대에서 미술해부학 강의를 하다가 옆 교실 학생들이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의 작업에 움직임을 접목했다. 첫 작품은 2004년 김홍도의 ‘묵죽도’를 영상화한 미디어 작업. “가장 현대 미술다운 텍스트가 미디어라고 생각합니다. 손 끝의 예술인 미디어적 특성을 살려 움직임이 담긴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그는 2002년 하정웅 청년작가상, 2005년 신세계미술상 대상·광주시립미술관 올해의 청년작가상, 2009년 대한민국 미술인의 날 올해의 청년작가상, 2010년 제22회 선미술상 등을 수상했다. 전시는 2005년부터 서울 한가람미술관, 광주영상문화관, 광주 신세계갤러리, 대구 리아트갤러리, 박여숙갤러리, 홍콩 카이스갤러리, 타이베이 형이상갤러리, 서울·부산 신세계갤러리, 서울 학고재, 선갤러리 등 국내외에서 매년 이어졌다. 내친 김에 2008년에는 연세대 영상대학원 영상예술학 박사과정도 수료했다. 그의 작품을 소장한 곳은 청와대를 비롯해 삼성전자, SK, 63빌딩, 전남도립대, 조선대, 연세대, 국립현대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경기도박물관, 광주 MBC, 광주 KBS, 주미한국대사관, 주한독일대사관, 미국 예일대 등 30여곳. ‘제2의 백남준’이라 불리며 영상 혁명을 주도해온 만큼 미국·중국·러시아·호주·싱가포르·스위스 등 각국의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전시하면서 힘든 점도 많지요. 제 작품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때 가슴이 쓰립니다. 작업을 위해 TV 모니터가 많이 필요한데 경제적으로 쪼들려 모니터를 구입하지 못할 때도 있었죠.” 첨단 디지털 작업을 욕심내고, 제작 기일이 짧게는 1주일, 길게는 두 달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제작비가 부족할 때도 있다고 했다. 요즘은 삼성전자의 TV 모니터 지원으로 한시름 놓은 상태. 기술적인 부분은 광주에 있는 이이남미디어아트연구소 연구원 9명이 지원한다.

“그동안 300여점의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대표작은 ‘박연폭포’와 ‘디지털 8폭 병풍’ 등 두 작품이죠. 병풍작업은 많은 비용이 들 뿐 아니라 처음 하는 작업이어서 제작을 시작할 때 조금 두려웠습니다.”

정선의 진경산수 ‘박연폭포’를 차용해 폭포수가 흐르는 영상을 만들었다. 또 정선의 ‘금강전도’에 전투기들이 출격하는 영상작업을 접목한 ‘09 금강전도’는 작가가 ‘금강전투도’라 부르듯 정선이 그린 평화로운 금강산이 300여년 흐른 지금 남북이 대치하는 비극의 땅임을 고발한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에서 먼로의 입술 위 점을 천천히 이동시키는 작업을 통해 사물의 고정관념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미디어 복제를 피하기 위해 작품별 에디션은 6개씩 제작한다.

“어떤 분들은 제 작품에 거부감을 보이기도 합니다. ‘작품 배경은 봄인데 왜 눈을 내리게 하냐’ ‘겨울 풍경 속에 꽃피는 장면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또 남의 작품을 사용해도 되냐고 우려하시는 분도 있지요.” 그가 차용한 작품들은 고전이어서 저작권 시비가 없는데도 과잉의 관심이 쏟아진다.

모바일 앱을 이용한 작품도 있다. 작품은 애플 앱스토어에서 서비스되는데, 지난해 11월부터 아이폰에서 ‘이이남’으로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받으면 된다. 또 가야금으로 연주한 파헬 벨의 ‘캐논’이 흐르는 www.22nam.com(이이남 작가의 홈페이지)에서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현대미술의 의미는 대중과의 소통입니다. 이제 거실이나 마트 등에서 누구나 손가락만 움직이면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겁니다.” 15일 미국 미시간대, 2월22일 홍콩아트센터에서 각각 시작되는 개인전 준비로 바쁘다.

유인화 선임기자 rhew@kyunghyang.com

입력 : 2011-01-11 20:57:25ㅣ수정 : 2011-01-11 20:5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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