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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그래픽 디자이너 하태희씨

[문화 프런티어](8) 그래픽 디자이너 하태희씨

ㆍ그녀의 그림보다 밝고 따스한휠체어 위의 ‘행복 전도사’

그래픽 디자이너 하태희(28)의 손은 마법 지팡이다. 그가 그린 그림은 동화책, 엽서, 교통카드, 컵, 옷걸이, 티셔츠, 벽화, 스마트폰 케이스 등으로 유익한 생활용품으로 변해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든다.

숙명여대 시각정보디자인학과 출신인 그는 현재 코엑스의 B2 엑스포 전시디자인팀 직원으로 일하며 12월8일부터 월간 디자인이 주관하는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도 참여하느라 매일 밤샘 근무를 한다. 특히 이번 페스티벌의 올해 주제가 ‘PROJECT-Thank you(세상을 치유하는 고마운 디자인)’여서 하태희는 몸이 지치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일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1㎝ 위, 그 작은 공간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따뜻한 그림을 그린다”는 그래픽 디자이너 하태희씨와 그가 만든 휴대폰 케이스 등 작품들.

“제가 근육병 환자여서 주변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목발을 사용하지도 못해 바깥 세상으로 이동하는 것은 물론 손가락 힘도 약해 물감도 남들이 짜줘야 하거든요. 그런 저를 위해 어머니는 물론 주변의 친구들이 항상 조를 짜서 도와줍니다. 감사할 사람, 감사할 일투성이라 이번 주제가 더욱 가슴에 와닿았어요. 무엇보다 수많은 신청 디자이너 가운데 제가 뽑힌 것도 감사하고요.”

표정이 너무 밝아 앉아서 대화하면 그가 장애인이란 사실을 잊을 정도다.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살며 달동네에서 성장하는 등 경제적 형편도 안 좋았지만 그는 절대 좌절하거나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어려서는 스케치북을 살 형편도 못되어 달력 뒷면을 벽에 붙여놓고 그림을 그렸다. 미술학원 등 사교육을 받지 못해 서울모드 패션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가 숙명여대에 다시 입학했다. 성적 등도 문제이지만 휠체어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가 그를 뽑는 것이 아니라 그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그는 경력 4년차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지만 이력서가 화려하다. 국제커뮤니케이션 디자인 공모전 입선을 비롯해 티셔츠·안경 등 포스터 공모전에서도 입상했다. 또 동화책의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만든 생활용품을 예술의 전당, 반디 앤 루니스 서점, W호텔 등의 문화상품 코너에서 판매하기도 했다. 서울시에서 지원하는 서울 상암동의 DMC 첨단산업센터 디자인 창작 스튜디오에 ‘1㎝ 공간’이란 이름의 공간을 만들어 활동했다.

“남들이 보지 못한 1㎝ 위로, 보이지 않는 1㎝ 공간을 배려하는 마음의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디자인이 있는 따뜻한 공간,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다독여 주는 편안한 일러스트를 그리는 게 꿈이거든요. 어두운 지하철에 화사한 벽화가 그려져 범죄가 줄어들었다는 기사를 봤는데 그런 세상의 작은 벽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서울디자인 페스티벌 사무국의 김온유는 “전문가들이 하태희씨의 작품은 색채감각이 뛰어나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묘한 힘이 있다고 평한다”고 전한다. 따스한 그의 품성이 작품에 오롯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로만 활동하면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아 헤이리마을의 전시회, 건축회사와의 작업 등에도 참여했다. 또 지난해 코엑스의 B2 엑스포 전시디자인팀 직원으로 취업해 직장생활도 거뜬히 해내고 있다. 직장의 배려로 1주일에 3번만 출근하지만 맡은 일엔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라 작업에 몰두한 나머지 응급실에 실려가기도 했다.

그가 건강한 이들보다 더 많은 활동을 하는 비결은 이처럼 성실한 태도와 더불어 ‘소통의 힘’ 덕분이다. 무남독녀 외동딸에다 외출이 힘든 장애인이어서 유난히 외로움을 타고 내성적이던 성격이 ‘장애인 캠프’에 참여한 후 명랑하게 바뀌면서 그는 해마다 장애인 캠프에 참여해 리더십을 익혔다. 19세에 직접 장애인 캠프를 만들어 80여명의 활동과 식사까지 책임지기도 했고 색채심리상담 자격증도 땄다. 이젠 누굴 만나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다른 이들의 고민을 들어준다. 중학시절엔 같은 반 친구들 모두에게 편지를 썼고 지금도 친구들에게 자주 편지를 쓴다. 그래서 동아리에서 만난 다른 학교 출신의 후배들이 기꺼이 그를 위해 휠체어를 밀어주고 서류정리 등 온갖 궂은 일을 도와준다. 인터뷰를 하는 날도 ‘손님 대접’을 해야 한다며 한 후배가 과자를 사오고 커피를 끓여줬다.

내달 8일부터 열리는 ‘서울 디자인 페스티벌’에 선보일 작품 .

“몸이 불편하니 힘든 일이 하나둘이 아니죠. 화장실 갈 때도 두 사람이 저를 번쩍 들어 앉혀줘야 하지만, 면접이나 회의 등에 참석할 때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문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친구들이 다들 도와줘요. 다른 예술가들은 여행을 하거나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디자인 영감을 얻지만 저는 주변사람들과의 대화 등 일상의 순간순간에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그는 앞으로 평면적인 그래픽 디자인만이 아니라 건축과 공공디자인, 벽화 등의 작업으로 활동 영역을 넓힐 계획이다. 자신이 체험을 통해 주변을 조금 더 배려하는 공간을 만들고, 벽에 그려진 기분좋은 그림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더 많이 즐겁고 행복해지길 바라서다. 그래서 평소에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항상 ‘감사하자’란 말을 주문처럼 되뇌인다.

“몸도 지치고, 이런저런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해요. 전 제 몸 하나만 건사하면 되지만 수백명의 종업원을 이끄는 CEO들은 얼마나 힘들고 걱정이 많을까, 대한민국을 이끄는 대통령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까…. 그리고 제가 주변에 불편함을 호소하고 요구하기 전에 제 일을 열심히 하니까 다들 도와주시더군요. 직장도 장애인 특채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제 서류와 포트폴리오를 보고 합격시켜 주신 거고, 서울시에서도 제가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있도록 경사로를 만들어 주셨답니다.”

손잡이가 고장나 철사로 동여맨 휠체어를 타고도 하태희는 명품소파에 앉은 듯 편안하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그의 마음과 손이 우리 세상을 더 밝고 환하게 만들어줄 것 같다.

글 유인경, 사진 김세구 기자
입력 : 2010-11-23 21:22:17ㅣ수정 : 2010-11-24 10:3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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