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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모피 패션디자이너 이유형씨

[문화 프런티어](6) 모피 패션디자이너 이유형씨
ㆍ모피는 풍성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깼다
ㆍ한국여성 볼륨감 살렸더니 ‘날개’가 됐다

<로마인 이야기>의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보석의 차가움과 모피의 부드러운 감촉에 매료되지 않는 여성은 여자도 아니다”란 말을 했다. 그만큼 부드럽고 부티(?)나는 모피는 여성들에게 유혹적이다. 나오미 캠벨이나 케이드 모스 등 슈퍼모델들이 누드로 동물보호 캠페인 포스터를 촬영하고도 정작 겨울에는 모피로 온몸을 휘감고 등장해 빈축을 사기도 한다.

‘퓨어리’(Fury)란 브랜드로 모피 의상을 만드는 이유형씨(32)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모피 패션디자이너다. 모피 의상은 수두룩하지만 트렌드가 반영된 디자인으로 해마다 모피 패션쇼를 여는 디자이너로는 그가 유일하다. 대부분 한겨울에만 바빴던 그가 올해는 봄여름 내내 고객을 맞느라 분주했다. 패션업계 전반에 모피가 트렌드로 급부상한 데다 지난해 불어닥친 이상기온 현상으로 모피의류가 방한용으로 각광받아 고객들의 주문과 신세계백화점 등에서 패션쇼 의뢰가 줄을 이어서다. 지난 겨울, 갑자기 닥친 한파에 예전에 입던 모피코트를 수선하러 왔다가 2~3개월을 기다렸던 이들이 올해는 아예 한여름에 모피수선이나 새 옷을 주문할 만큼 모피업계는 호황이다.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출신인 이유형씨가 모피디자이너가 된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다. 모피전문가인 어머니와 모피수선공장을 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태어날 때부터 장난감이 모피 조각일 정도였다. 매장 청소부터 해외 모피박람회 출장까지 집안일을 돕다가 1999년 <퓨어리>란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모피공부를 했으니 모피는 제게 유전자이자 운명인 것 같아요. 한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모피디자이너가 됐으니까요. 어머니가 운영하는 ‘오영자모피’가 너무 수선전문점으로 여겨져 디자인 개념을 알릴 필요가 있어 제가 대표 디자이너가 되어 퓨어리를 만들었죠. 당시 모피 의상들이 주로 외국수입품이라 제가 디자인한 한국여성의 체형에 맞고 몸의 선을 살린 모피옷이 눈길을 끈 것 같아요.”

‘퓨어리’란 브랜드가 패션계에 화제가 된 것은 탤런트 이혜영과 황신혜의 모피옷을 제작하면서부터. 모피는 무조건 풍성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허리가 꼭 붙는 날렵한 의상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그후 전도연, 박정수, 변정수 등 국내스타들이 퓨어리의 단골고객이 되었고 해마다 연말 방송대상 등 시상식장에는 퓨어리 제품을 걸친 연예인들로 넘쳐났다. 해외명품 브랜드만 화보 촬영을 하던 <보그> <바자> 등 콧대높은 패션전문지들도 ‘펜디’ ‘페레’ 등 해외명품 브랜드와 퓨어리를 나란히 소개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뱃속부터 모피 공부를 했으니 모피는 내게 유전자이자 운명
해외명품 브랜드 고집하던 분들 이젠 국산 ‘퓨어리’ 찾으니 뿌듯
아직 젊지만 장인정신 갖고 해외시장에 ‘모피한류’ 일으킬터

국내 패션계에 모피디자이너가 드문 것은 일반 디자인 개념으로는 옷을 만들기 힘들기 때문이다. 옷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동물 모피는 밍크부터 다람쥐까지 250여종. 그러나 여우, 밍크 등 동물에 따라 털과 가죽의 특성이 다르고 같은 밍크라 해도 한 마리당 크기와 모양새, 색깔이 달라 10년 이상 모피를 다루지 않고는 어떤 옷이 만들어질지 예상하기조차 힘들다. 또 모피 가격도 일반 옷감처럼 원단공장에서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경매시장에서 형성되어 디자인 감각만으로 마음대로 소재를 다룰 수도 없다. 물론 모피라고 다 고가는 아니다. 양털, 토기털 등은 비교적 저렴하고 색상도 자유자재로 염색할 수 있어 젊은층의 패션소품으로도 인기다. 올해는 파이톤(뱀피)과 세이블, 링스(스라소니), 밍크, 폭스, 캐시미어 등의 소재를 다양한 형태로 결합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패션평론가이자 스타일리스트인 서영은씨는 “퓨어리의 제품은 디자인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세계적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고객 장지영씨는 “퓨어리 밍크코트를 입고 미국 최고급 백화점인 버그도프굿맨에 갔는데 외국인들이 ‘아주 근사하다. 어디 제품이냐’고 물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씨는 모피디자이너로서의 필요한 자질로 패션감각과 더불어 ‘인내심’을 꼽았다. 모피는 동물의 털이라 반영구적으로 수명이 긴 제품이지만 물이나 불, 기타 자극에 약해 자동차보다 더 자주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입다가 싫증나거나 유행이 지나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수선을 원해 한 벌을 판매하고도 수십년을 책임져야 한단다.

‘퓨어리’가 유명해지면서 국내 대기업이나 자본가들로부터 스카우트와 합병제의가 많지만 이유형씨는 모두 거절했다. 모피는 돈이 아니라 ‘장인정신’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차 모피옷을 제작하는 전문가들이 줄어들고 중국으로 공장이 옮겨지는 것이 안타깝단다.

“그동안 해외명품 브랜드만 고집하던 분들이 이젠 국산인 우리 제품을 사시니 주위에서 ‘애국한다’는 칭찬도 받아요. 아직 젊지만 장인정신을 갖고 한국모피의 자존심을 살린 제 모피옷으로 해외시장에 진출할 겁니다.”

글 유인경·사진 김세구 선임기자
기사입력 : 2010-11-09 21:24:57ㅣ수정 : 2010-11-09 21:2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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