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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신곡(神曲), 테크노 연옥

The Divine Comedy, Techno-purgatory
신곡(神曲), 테크노 연옥

 

신곡(The Devine Comedy)
2011년 3월 21일 ­ 5월 17일
하버드대학 캠퍼스 3곳
http://thedivinecomedy.org/

오늘날 예술, 디자인, 액티비즘의 관심사는 더욱 강력하게 수렴되고 있다. 전시회 ‘신곡(神曲)’은 이를 둘러싸고 새롭게 출현하는 공간적 실험의 실천들을 탐색하는 자리이다. 인간, 정신, 우주라는 거대한 세 가지 주제를 논의하기 위해, 중국의 아이 웨이웨이(Ai Weiwei), 덴마크의 올라푸르 엘리아손(Olafur Eliasson), 아르헨티나의 토마스 사라세노(Tomás Saraceno), 3인의 미술가들이 초청되었다. 아이 웨이웨이는 억압과 저항의 중국 근현대사를 지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사적 삶을, 엘리아손은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열린 새로운 감각적 인지 세계를, 사라세노는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새롭게 재편되는 도시 공간 개념을 펼쳐 보인다. 이것은 이번 전시가 제시하는 21세기 신곡의 세 가지 조건이기도 하다. 프로젝트마다 개념적 성격이 강한데다, 장소특정적 기획으로 각 프로젝트가 세 곳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신곡’ 전체를 파악하기가 녹록지 않지만, 대략 아이 웨이웨이의 ‘인간’은 ‘신곡’의 지옥편에, 사라세노의 ‘우주’는 천국편에, 엘리아손의 ‘정신’은 천국과 지옥 사이, 즉 연옥 즈음이라 이해할 수 있다.

아이 웨이웨이, ‘무제(Untitled)’, 2011
2008년 5월 중국 쓰촨 지역 지진으로 사망한 수 천 명의 학생들의 명복을 비는 기념비적 인스톨레이션. 5,335개의 동일한 책가방으로 만들어진 설치물과 함께 사망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추모(Remembrance)’(2010)가 흘러나온다.

토마스 사라레노, ‘구름 도시(Cloud City)’, 2011
태양열 전자 셀, 센서, 녹음기를 이용하여 주변 환경의 상황을 녹화, 타지로 전송하는 시스템. ‘타인의 연맹(Confederacy of Others)’은 공중에 설치된 ‘어번 오션(Urban Ocean)’ 장치와 인터랙션할 수 있게 하는 중간 장치로, 지역 내 아마추어 오퍼레이터의 협력으로 운영된다.

올라푸르 엘리아손, ‘프로젝트 - 쓰리 투 나우(Three to Now)’, 2011
외부 시각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전복하는 테크놀로지-실험 프로젝트

그 중 인간계와 자연계 중간에서 둘 사이를 초조하게 오가는 올라푸르 엘리아손의 신연옥편은 빛과 색에 대한 일종의 시지각 연구 실험으로 천국과 지옥의 경계에 선 기분을 경험케 한다. 그의 작품에 대해 일반적으로 접속의 미학, 오가닉 아트라 부르는 시각도, 이러한 경계적 성격과 무관치 않다.

거울로 만들어내는 실상와 가상의 관계, 자연현상과 인간의 감각적 병리학의 관계, 기술적 장치와 관객의 지각 장치간의 관계, 지각적 잔상의 예측 가능성과 주변 환경의 예측 불가능성의 관계. 거울 조각에서 시작되는 엘리아손의 작업들은 관계, 연결, 사이를 존재의 본질로 부각시키며 파헤쳐간다. 여기에서 과학은 현상을 포착하는 도구나 방식이 아니라, 현상과 경험을 만들어내는 기제로서 기능하며, (자연)세계는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관찰의 대상이 아닌 기술적 실험의 목적이자 결과이다. 엘리아손의 이런 현상기술학적((phnomenotechnics) 프로젝트는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통해 경험과 현상을 만들어내는 실험실이자 공장이다.

엘리아손의 지각/감각 실험은 현상의 본질을 관계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오가닉 논의로 이어진다. 오가닉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살아 있음이나 생동적인 어떤 것을 뜻하는데, 이 생명력은 아메바처럼 하나의 덩어리, 존재 그 자체에서는 일어날 수가 없고 오직 개별적인 분절들이 연결되는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부분과 부분이 만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트랜스액션(transaction; A와 B, 두 요소 사이에 일어나는 인터랙션보다 확장된 의미)과 이를 통해 이어지는 관계가 곧 오가닉의 속성이자 본질이다. 이렇듯 오가닉한 전체(whole)가 구성되기까지 발생하는 트랜스액션 때문에, 우리는 부분적 요소(parts)들의 속성만으로 전체를 예상할 수가 없다. 오가닉한 것의 속성은 ‘전체는 부분의 총합보다 크다(the whole is greater than the sum of its parts)’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랜 명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이질적 분절들이 의미 있는 관계로 연결되는 바로 이 지점, 분절과 연결의 경계에서 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해, 오가닉한 것(실제)의 경험은 요소와 요소, 분절과 분절이 연결되는 경계점에서 감지되는 에너지의 경험이다. ‘그리고(and)’라는 접속사가 앞 뒤의 단어를 분리하는 동시에 둘을 이어 의미 관계를 형성하듯, 현상과 존재의 의미 역시 관계의 연결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실제에 대한 지각적 경험은 현상 요소들이 만날 때 만들어지는 접합 돌기 혹은 파장에 대한 감각적 경험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올라푸르 엘리아손, ‘고독과 침묵에서 자라난(I grew up in solitude and silence)’, 1991
원형 거울 위에 세워진 촛불

원형 유리 위에 세워진 촛불 ‘고독과 침묵에서 자라난’은 실상과 거울에 비친 가상을 동시에 비교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물론 나르시소스처럼 반사된 이미지를 실상과 구분하지 못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작품의 연출 형태를 유심히 살펴보면, 서서히 타 들어가는 촛불이 고독이나 침묵을 상징한다고 보기에 어색할 정도로 밝고 심플한 구성에, 여운이나 그림자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는 인스톨레이션으로, 보는 이들이 작품의 의도나 메시지를 알아내기 위해 신경을 바짝 세워야 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작품이다. 그래도 이 지각/인지 실험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면 머리는 비우고 감각적 경험 모드만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촛불은 고독과 침묵의 시간이 필요할 때 매우 유용한 도구로 사용된다. 녹아 내리는 초의 물질감과 빛, 향기를 통해 전달되는 초의 감각적인 경험은 복합적이고 총체적이다. 그러나 미래적인 공간 연출에 흔히 사용되는 거울이 촛불과 결합되면서 공간과 촛불의 존재는 생경하게 밝아지고 우리는 실상과 가상(반사상)의 경계를 경험하게 된다. 하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점, 연옥은 이렇게 테크노 판타지로 채워진 낯선 이국적 풍경이다.

디자인 대학원 건물 로비에 마련된 오픈 갤러리에 전시된 엘리아손의 작품들이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이라면, 바로 이 빛과 거울의 반사광, 그 위에 더해진 화려한 색채, 즉 실상이 아닌 반사상들 그리고 실상과 가상을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미묘한 테크닉에 있다. 그런데 왜 실상보다 가상에 먼저 눈이 가고 또 한편으로 우리는 왜 그 가치를 ‘가짜’라는 말로 폄하하는 것인가. 가상은 의미와 의미 사이의 접합점 없음, 분절의 돌기 없음, 즉 생명 에너지가 없는 인오가닉(inorganic) 상태로, 지각 경험을 가차없이 단순화 하기 때문에, 실상보다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대면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현재 우리의 경험 세계는 엘리아손이 보여주듯 순전한 오가닉도, 순전한 인오가닉도 아닌 둘 사이의 접합점이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대문자로 표시된 오가닉 지각 세계가, 갑작스레 소문자의 인오가닉 세계를 만나는 식 (A+B)+a이 되는데, 여기에서 대문자 군과 소문자를 연결하는 + (and)로 인해 새로운 오가닉(관계)으로 진화해 간다. 거듭되는 반사와 오가닉-인오가닉 간의 트랜스액션은 점점 더 복잡하고 수식화가 불가능한 오가닉 하이브리드가 되어 새로운 지각 세계를 만들어낸다.


엘리아손의 이 전시는 개념미술이나 실험미술이라기 보다 실험실 예술에 가깝다. 하지만 과학전시 같은 분석적 설명은 생략된 채, 관객들이 직접 결과를 체험할 것을 기대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경험하라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특별한 체험 공간 연출이 필요하다. 강력한 유인 장치 없이 관객이 자발적으로 체험에 빠져들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중간 사이즈 작품들을 한 공간에 나열한 이번 전시는, 실상과 가상의 경계 어딘가를 얘기하기에 분명 비효율적이다. 물론 작품들 사이에 컬러와 빛이 부딪히고 반사에 반사가 거듭되는 협소한 전시 공간을 둘러보고 나면 여기가 천국과 지옥 중간쯤 어디겠구나 하는 생각은 들 수 있다.

‘신곡’ 프로젝트 전체를 두고 기획자는 ‘미술과 디자인의 통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별로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사실 어떤 점에서 두 분야가 통합된다는 것인지, 또 통합이라는 게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다. 엘리아손의 작품만 놓고 볼 때, 인지 과학에 가까운 지각 실험을 디자인이라 하는 것인지, 또 개념미술 같은 전시 연출을 두고 미술이라 하는 것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데,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잘못된 정의일 뿐이다. 시지각에 기반한 개념적 작업을 어찌 미술 영역 또는 디자인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을까. 이런 류의 통합적 연구는 고대에도, 중세에도 있어 왔고 지금도 과학-철학-시각적 재현 분야를 가로지르며 계속되고 있다. 간학제적 연구는 미술이나 디자인 영역에 관계없이 가능한 방법의 문제이므로 이것을 두 영역의 통합이라고 볼 수는 없다. 통합을 말하기 위해서는 두 영역이 구분되는 차이를 알아야 하는데, 미술과 디자인을 가르는 사실상의 경계는 서로 다른 시장-사용가치와 미적가치가 교환되는 두 개의 시장-에 있다.

사용가치와 미적가치의 관계, 그리고 두 시장 사이의 흐름에 관해 칼 크라우스(Karl Kraus)는 1912년 일찍이 ‘러닝룸 (Spielraum; Running-Room)’ 개념으로 설명한 바 있다. “아돌프 루스와 내가 한 것이라곤 고급 항아리(urn)와 요강(chamber pot)을 구분함으로써 (서로 다른 ‘가치’ 사이의 전환/전이를 허용하는 멈춤 공간인) ‘러닝룸’ 개념을 보여준 것뿐이다. 이 구분을 못하는 그룹은 항아리를 요강으로 사용하는 경우와 요강을 항아리로 사용하는 경우로 나뉘는데, 항아리를 요강으로 사용하는 이들은 예술을 사용가치로 끌어들이려 한 아르누보 디자이너들이고, 반대 편의 사람들은 실용적 사물을 예술로 끌어올리려는 기능주의 모더니스트들이다.” 크라우스는 두 그룹 모두 사용가치와 미적가치를 혼돈하고 둘 사이에 이루어질 수 없는 통합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러닝룸’은 사물의 디자인 의도와 실제 사물이 사용되는 컨텍스트 사이의 간극 혹은 틈으로, 자유로운 주체(subject)와 문화의 필요조건이기도 한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예술을 예술이게 만드는 본질이나 절대적인 문화적 가치라는 것은 없으며 다만 ‘가치의 구분(distinction)’과 다른 가치로의 전이를 가능케 하는 ‘러닝룸’만이 있을 뿐이다. 1990년대 이후 디자인 비평에서 할 포스터는 디자인-미술(예술) 시장의 관계를 설명하며, 러닝룸을 중요한 개념으로 부각시켜 해석을 확장시켰다. 특히 프랭크 게리 같은 스타 디자이너들이 아티스트로 명명되고, 또 이들의 디자인이 사용가치에서 미적가치로 또 예술 시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역시 가치의 비결정성, 가치와 가치 사이의 틈인 러닝룸이 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산업 디자인에 예술성을 더하는 것이 답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용가치에 미적가치를 더한다는 것 혹은 둘을 통합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며, 다만 컨텍스트의 이동을 통한 새로운 가치로의 전환이 있을 뿐이다.

굳이 계속해서 ‘미술과 디자인의 통합’이라는 슬로건을 강조하는 것은 미술 영역의 전유물처럼 간주되어 온 미적가치를 디자인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헤게모니 씨름처럼 보일 뿐이다. 디자인이 미적가치의 상대적 우위를 얻어내려는 것은 모던 디자인이 보여준 사용가치 절대주의에서 벗어나려는 대안적 노력이다. 그러나 ‘미술과 디자인의 통합’이라는 실체 없는 슬로건으로, 뿌리 깊은 모던 디자인의 사용가치를 미적가치로 갈아치우려는 성급한 시도는 미술과의 소모적인 헤게모니 경쟁으로 끝날 뿐이다. 결국 미적가치는 끌어당겨 얻어지지 않으며, 미적가치와 그것이 거래되는 시장으로의 이동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엘리아손이 보여주는 프로젝트의 실험가치는 주로 미적가치로 평가되어 왔고 작품 역시 미적가치 영역에서 거래되어 왔기 때문에 그에게 미술과 디자인의 통합이라는 말은 더 어울리지 않게 들린다. 그러나 만약 디자인에 사용가치 대신 실험가치를 대입한다거나 실험가치를 미술과 디자인에 폭넓게 적용한다면 대략 (미적가치와 사용가치의 통합은 불가하더라도) 둘 사이의 중간쯤 어디, 연옥 정도에 위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엘리아손의 시지각 실험 프로젝트가 미술관에서 전시되건 디자인 스쿨 로비에서 전시되건 장소가 갖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서 도리어 관객들은 유연하게 반응한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각과 감각이 효과적으로 반응하고 프로젝트의 의미를 연결해낼 수 있는 연출 장치이다. 세 명의 작가가 보여주는 세 가지 테마 ‘인간’, ‘정신’, ‘우주’를 모두 이해해야만 전체 기획 의도를 알 수 있는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는 세 장소를 효과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의도한 바는 아닐 테지만 세 지점을 의미 있게 연결하려는 각별한 의지는 없어 보인다. 세 가지 테마를 연결하지 못한 단테의 ‘신곡’은 어떤 이들에게는 ‘지옥편(inferno)’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천국편(paradise)’로만 기억된 채 끝나지 않았을까 염려된다.


글. 김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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