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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김미리 기자의 디자인 왈가왈부] 그냥 새하얀 냉장고는 없나요

김치냉장고를 한 대 장만하려고 집안을 휙 돌아봤습니다. 5년 전 친정 엄마가 골라주신 에어컨, 당시 제일 인기 있었다는 진한 와인색입니다. 다음은 냉장고. 유명작가가 디자인했다는, 커다란 꽃무늬가 군데군데 박혀 있는 팥죽색 양문형 냉장고입니다. 그나마 세탁기는 얌전한 흰색. 살 때는 밋밋해 보였는데 그래도 제일 안 질리는 것 같군요. 공간은 하나인데 어쩜 이리도 통일성이 없는지. 촌스러운 내 컬러 감각을 탓해야 하나, 슬쩍 자괴감이 들다가 곰곰 생각해 봅니다.

우선 왜 다 같은 색이 아닌 걸까. 신혼이 아니고서야 한두 푼 아닌 대형가전을 한꺼번에 사는 건 무리입니다. 시간 차를 두고 필요한 걸 하나씩 바꾸게 되지요. 그런데 문제는 워낙 모델 교체 사이클이 빠르다 보니 1~2년 시간 차를 두고 사려면 소위 '같은 라인'의 제품을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예컨대 5년 전 샀던 앙드레김 냉장고가 맘에 들었으니 같은 라인의 앙드레김 에어컨을 아무리 사고 싶다고 해도 지금은 살 수가 없습니다. 단종됐으니까요.(제 취향은 절대 앙드레김 냉장고는 아닙니다만.) 기업 입장에선 제품 교체 주기를 짧게 해 이윤을 남기는 게 맞겠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전략입니다.

둘째, 그럼 왜 나는 이런 색, 이런 무늬를 산 걸까. 물론 1차 책임은 선택 당사자인 제게 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도 핑계 아닌 핑계입니다. 가전회사에서는 매해 주력 색깔과 디자인을 내세웁니다. 올해는 와인색, 올해는 꽃무늬, 올해는 블랙 하는 식으로요. '데카르트 마케팅(Techart Marketing)'이라 해서, 유명 예술가의 작품을 제품 디자인에 적용한 마케팅 전략이 한창 각광받던 2~3년 전엔 더 심했지요. 매장 직원은 소비자들에게 그해의 메인 디자인을 고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입하지요. 저 같이 귀 얇은 이들은 결국 그 유혹에 넘어갔을 테고요. 인기 모델이라는 이유로 다른 모델보다 20만~30만원 비싼 가격을 치르고 말이지요.

이번 김치냉장고만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올 최고의 히트 모델이라며 다른 모델보다 30만원이나 비싼,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는 모델은 아예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 질릴 것이며, 다른 가구와 맞추기도 힘들다는 걸 이젠 너무 잘 알기에.

그저 하얀, 새하얀, 아무 무늬 없는 냉장고를 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매장을 돌아다니고 인터넷을 뒤져도 아무 무늬 없는 하얀 김치냉장고는 없네요. 기본에 충실한 이름 그대로 백색(白色)가전은 없는 건가요.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입력 : 2011.01.0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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