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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디자인, 너와 나를 위한 배려

‘인클루시브 디자인’ 알리기 위해 방한 … 영국 왕립예술학교 줄리아 카심
 

①오염물질이 묻어도 세탁해 재활용이 가능한 방석. 엉덩이를 받쳐주는 쿠션 기능도 중시했다. 소·대변을 가리지 못하는 치매 노인이나 환자들에게 유용할 아이템이다. 조만간 상품으로 나올 예정이다. ②③ 누구나 쉽게 들 수 있는 프라이팬. 손잡이가 손목 아래를 받쳐줌으로써 프라이팬의 무게가 분산되도록 고안했다. 두 손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나 노인에게 유용하다.

‘인클루시브 디자인(Inclusive Design)’이 뜨고 있다. 세계적 트렌드다. 장애인·노인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디자인이다. 공존과 상생의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다. 예컨대 장애인을 위한 욕실 캐비닛. 캐비닛 높이를 낮춰 휠체어를 타고도 이용할 수 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위해 현관문 비디오폰을 낮은 곳에 설치하기도 한다. 국내에서도 고령자·장애인용 보금자리 주택이 도입되면서 관련상품이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다. 7~12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디자인 코리아’(한국디자인진흥원 주최)에서도 ‘배려하는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시각장애인도 옷의 색깔을 분간해 자신만의 멋을 낼 수 있도록 한 의상 색깔표시 점자 칩, 어린 아이도 한 손으로 손쉽게 들 수 있는 프라이팬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영국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 할렌 햄린 센터(Helen Hamlyn Center)의 수석 연구원 줄리아 카심(63·사진)이 10년 간 이끌어온 디자인 개발 대회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의 성과였다.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 27명, 장애인 3명과 함께한 챌린지를 위해 방한한 카심을 만났다.

 -‘인클루시브 디자인 챌린지’를 설명하면.

 “디자이너와 장애인이 디자인 과정에 직접 참여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거다. 장애인의 창의성과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결합하면 더 나은 무언가를 창출해낼 수 있다. 핵심은 두 그룹을 제한된 시간(서울에서는 48시간)안에 해결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으로 몰아넣는 거다.”

  -‘장애인은 디자인 전문가’라고 말했는데.

  “잘못된 디자인(design failure) 때문에 생긴 문제를 장애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극복하며 살고 있다는 의미다. 훌륭한 디자인이 나오려면 무엇보다 양질의 정보가 필요한데, 정보를 얻는 최고의 방법은 잘못된 디자인 때문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이다. 디자인 혁신의 역사가 그랬다. 타자기·리모컨·컴퓨터 마우스·비데 등은 애초 장애인을 위해 디자인된 것이다. 이를 대중을 위한 디자인으로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다.”


노인이나 장애인이 한 손으로도 쉽게 붙일 수 있는 일회용 밴드. [영국문화원 제공] -챌린지의 가장 큰 성과는.

 “핵심은 상품화가 아니다. 장애인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디자이너들은 새로운 사고법을 경험하게 된다. 챌린지는 대회 형식으로 열리는 워크샵 프로그램이다. 디자이너들은 경쟁을 좋아하니까.(웃음) 지금까지 참여한 디자이너가 12개국, 총 1200명에 이른다. 이게 진정한 의미의 성과다. 요즘엔 노키아·P&G 등 대기업들의 워크샵 요청도 늘고 있다. 인클루시브 디자인을 상품의 영감을 얻는 방법으로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까.

 “한국에선 노인층이 급격히 늘고 있다. 노인을 위한 디자인부터 생각하는 게 좋을 듯싶다. 몸이 불편한 부모님이 집안에 고립돼 있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님들이 사회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을 찾는 게 인클루시브 디자인이다. 물리적 접근성, 혹은 편의성만 따지면 안 된다. 미적인 요소도 중요하다. 노인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 갖고 싶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 ”

 -짧게 둘러본 한국의 디자인은 어떤가.

  “표지판 등 정보를 다루는 디자인에 문제가 많다. 한국을 처음 찾는 사람에게 길을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가장 바꾸기 쉬운 게 정보 디자인이다. 세상엔 20~30대의 건강한 젊은이만 있는 게 아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영국 출신의 카심은 원래 순수미술(조각)을 전공했다. 일본으로 유학 가 1971~98년 일본에서 생활했다. 저팬 타임스 기자로 일하며 박물관·관청 등 일본의 건물이 장애인의 물리적 편의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데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했다.

 “사실 제 딸도 장애인입니다. 영국이란 익숙한 환경을 떠나보니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어요. 일본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조각은 그만뒀지만, 그보다 의미 있는 일을 찾았기에 보람이 큽니다.”

이은주 기자

◆인클루시브 디자인=북유럽에서는 ‘모두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All)’, 미국·대만·일본에서는 ‘보편적 디자인(Universal Design)’으로 불린다. 영국에서는 인클루시브 디자인이라고 한다. 다양한 사용자를 포괄하는 디자인이라는 의미다. 역사적 배경은 조금씩 다르지만, 디자인에서 소외된 층을 포용한다는 취지는 같다. 미국에서는 베트남 참전병들의 사회복귀 과정, 활발하진 인권운동에 힘입어 이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 사회적 소수를 넘어 모든 소비자에게 편리한 주류 디자인으로 활용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0.12.14 00:28 / 수정 2010.12.14 0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