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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시간 너머 공간, 자연과의 소통…디자인도 ‘스토리’ 다

타워팰리스 설계한 디자이너가 텃밭에 빠진 까닭은?

화려한 조명을 받고 있는 건축물이 화면 위에서 그 위용을 드러낸다.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그래서 더 생소한 실내인테리어가 눈앞에 펼쳐진다. 타워팰리스 디자이너로 유명한 최시영(55) 리빙엑시스 대표가 자신이 참여했던 프로젝트의 사진을 한 컷 한 컷 소개하자 강당에 모인 학생은 숨을 죽이고 시선을 화면에 고정시킨다. 디자인을 입은 영상 속 건축은 건물이라기보다 예술에 가까워 보인다. 최근 경희대 크라운관에서 열린 ‘상상과 창조의 인문학 강좌’에 강사로 선 최 대표는 요즘 디자인 열풍 속에 학생에게는 선망의 대상이다.

실업·부도·좌절…희망이 된 ‘자살여행’

소위 ‘잘나가는 디자이너’가 되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학창시절 음악과 미술에 관심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사생대회 입상을 해도 집에는 숨겨야 했다. 고등학교 때도 미술학원에 몰래 다니면서 마음고생을 하다가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건축학과였다. 홍익대 건축학과 75학번인 그는 대학 시절 온통 수치와 공식으로 진행되는 수업방식에 처음에는 적응을 못했다. 하지만 당시 지도교수가 최 대표의 독특한 표현기법에 주목, 인테리어를 제의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인테리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당시 선뜻 뛰어들기에 주저했으나 일단 뭔가를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인 그는 친구의 소개로 당시 모형의 대가였던 기흥성 씨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막막함은 이어졌다. 직장도 구하지 못해 방황했다. “선천적으로 조직생활이 맞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아들이 샐러리맨의 길을 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긴 아버지의 권유로 일단 경기도 일대 농장에서 농업일을 하게 됐지요.”

소를 키우고 사과밭과 은행나무를 재배하면서 원치 않은 일을 해야 하는 게 죽을 맛이었다. 새로 태어난 송아지가 죽을 때는 당장 일을 그만두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마침 건설회사 현장소장으로 일하던 친구와 함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면서 전공을 살리며 현장감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만 해도 인테리어 전문가가 드물었던 시절. 사무실을 열고 의욕에 차 있었지만 역시 삶은 그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친구와 동업으로 시작한 사업이 사기를 당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그는 죽겠다고 떠난 제주도 여행길, 산굼부리의 들판과 으악새에서 삶의 희망을 보았다. 단순미과 절제미, 여백의 미가 그를 엄습해 오면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동에 편안함을 느끼게 됐다.

“이 느낌이 무엇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면서 다시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일었지요.”

대박난 봉사프로젝트…인생 전환점을 맞다

다시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면서 라이프스타일 전문잡지인 ‘행복이 가득한 집’ 이영혜 디자인하우스 사장과의 인연은 그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줬다.

“제주도 여행에서 돌아와 종교생활에 전념하면서 지체장애 도우미의 활동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어요.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던 차에 서민을 위한 무료 개조 프로젝트를 이 사장이 제안하더라고요. 도우미와 같은 봉사활동은 못해도 이건 내가 할 수 있겠다 싶어 선뜻 응했지요.”

대기업의 후원을 받으며 잡지에 연재된 이 프로젝트는 소위 대박이 났다. 바로 방송에서 비슷한 아이템으로 진행하자는 제의를 받으면서 언론의 주목을 한몸에 받게 됐다.

그는 “이를 계기로 디자이너 마케팅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면서 후배에게 용기를 준 것에 보람을 느낀다”며 “당시 주말도 없이 사비를 들여가며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전념하다보니 어느새 스타 디자이너가 돼 있었다”고 겸연쩍어했다.

최 대표는 1994년 국내 최초로 이 사장과 함께 리빙디자인페어를 시작했다.

앞날이 탄탄대로일 것 같았던 최 대표에게 다시 한 번 시련이 닥쳤다. 41세의 늦은 나이에 결혼해 첫째 아들이 태어나기 1주일 전, 7억원 상당의 부도가 나면서 충격에 빠졌다. 업계에서 통용되던 어음에 발목이 잡힌 것.

이때 최 대표는 결심했다. ‘시공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어음은 안 받는다’ ‘계약 이후 작업에 착수한다’ ‘경쟁적 계약은 체결하지 않는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최 대표가 일할 생각이 없다는 의도로 이해할 만큼 파격적이었다. 자신의 작업에 자신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일이었다.

설계비·주거문화 개념 도입…혁신의 시작

그가 인테리어 업계에 남긴 족적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설계비 개념을 도입했다. 그가 먼저 설계비를 공개하면서 다른 설계사나 회사도 설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 돼 디자인 자체의 가치를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고 자평했다.

90년대 초 분양가 자율화로 전문직 종사자의 단순하고 절제된 디자인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일거리가 늘었다. 디자이너 브랜드로 타워팰리스 설계에 참여하면서 설계와 시공을 같이하던 당시 관행을 깨고,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설계사의 출현을 가져왔다.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설계사는 아직도 국내 10여명이 안될 정도로 희소성이 있다.

이와 함께 ‘주거문화’라는 개념을 도입, 공간 위주의 설계에 시간 개념을 도입한 것도 혁신적이다.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의 3요소는 스토리텔링, 지속성, 쌍방향이다. 고객의 수준이 올라가면서 디자이너도 단순히 요구사항을 맞춰주는 수준에서 탈피해 자신만의 디자인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감동을 주는 디자인을 위해서는 단순히 독창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단순히 행위가 일어나는 공간으로서의 디자인이 아니라 어떤 행동을 야기할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남산 자물쇠 전망대는 디자인의 의도 여부를 떠나서 누군가 걸어놓은 자물쇠가 다른 이로 하여금 그 행동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갖는다. 이 과정에서 디자이너와 소비자 간 쌍방향 소통이 가능해진다. 또한 이를 지속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도 디자이너의 몫이다.

그래서 그가 참여하고 있는 것이 망고나무 기부운동이다. 기부를 하면 기부자에게 나뭇잎를 주고 그 잎으로 나무 한 그루를 완성해가는 프로그램이다. 망고나무의 수명이 100년이라는 점에서 착안, 기부자가 한 잎 한 잎 붙여가면 100년 후 망고나무가 완성되고 그동안 아프리카는 자연을 보존할 수 있게 된다.

이 기부운동은 최 대표가 추구하는 디자인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기부라는 행위를 통해 아프리카에 나무를 심어준다는 사연을 바탕으로 100년이라는 지속성과 기부자는 망고트리에 기부함으로써 보람을 느끼고, 참여한 디자이너는 이를 통해 사업을 넓혀 세계 각지에 망고나무를 세우게 된다.

“텃밭은 천연냉장고”  생활속 디자인이 화두

그는 디자인의 모티브로 늘 ‘격’을 염두에 둔다. 계층과 미술사조를 넘나드는 ‘유치하지 않은 디자인’이다. 그래서 최 대표의 작품에는 순환과 정화의 의미로 ‘물’이 많이 사용되고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책’, 이국적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여행’, 요철을 도입한 ‘즐거움’ 등이 자주 등장한다.

최근에는 텃밭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도시화로 버려진 산간지방에 활기를 불러일으킨 일본의 야외미술축제인 ‘에쓰고 쓰마리 트리엔날레’에서 영감을 받은 최 대표는 같은 텃밭이라도 그 안에 미적 요소를 찾을 수 있도록 디자인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미 시작된 귀농시대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 ‘텃밭=천연냉장고’라는 것이 그가 요즘 자신에게 던지고 있는 화두다. 생활 속 디자인이다.

최시영의 디자인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기존의 ‘베스트원(best one)’을 추구하는 루저문화에서 ‘온리원(only one)’의 디자인으로 나가야 한다.”



인테리어혁명 큰 족적
생활공간 트렌드 주도

최시영(55) 리빙엑시스 대표는 홍익대학교 건축과와 건축도시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 실내건축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공간을 통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모색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건축가다.

그는 기본에 충실한 아날로그형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특히 큰 반향을 일으켰던 타워팰리스 인테리어는 아파트가 매력있는 디자인 브랜드가 될 수 있다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티누스, 미켈란, 파주 헤르만하우스, 부산의 퀸덤, 창원의 씨티쎄븐에 이르기까지 늘 앞서가는 디자인과 트렌드를 제안하고 있다. 공간을 디자인함에 있어 그 속에 담을 사람과 문화를 먼저 생각하는 그는 평택 북시티 및 인천공항 아트디렉터, IFI(국제실내건축가연맹) 총회 및 세계실내디자인대회 조직위원장을 역임했으며 LG하우시스 자문위원, 대한주택공사 디자인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또한 2012 여수세계박람회 돌산지구 내 웰컴센터, 테라스하우스, 콘도미니엄, 풀빌라 등 단지 조성을 위한 아트디렉터를 맡아 대한민국 생활공간의 문화를 디렉팅하고 있다.

그동안 ‘2010 ASIA INTERIOR AWARD’ 은상을 비롯해 2008 국토해양부 장관상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 디자인단체 총연합회 회장상, 한국실내건축가협회 작품상, 갈매상, 명가명인상(名家名人嘗) 등을 수상했고 현재 홍익대학교 건축도시대학원 디자인교수로 출강 중이다.

이태형 기자/thlee@heraldm.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m.com

헤럴드경제 | 2010-11-17 09: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