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기가 위기를 맞은 건 아파트가 생기면서부터다. 앞마당이 없으니 장독대가 사라졌고, 장독도 쓸 일이 없게 됐다. 장독이 주를 이룬 옹기는 용도폐기될 운명에 처했다.
한데 이 우직한 그릇, 옹기는 여전히 모양과 용도를 바꿔가며 살아남았다. 그리고 지금 식기로, 화분으로, 가구로 자체 혁신은 계속된다. 실제로 옹기는 그런 그릇이다. 그저 실생활에서 쓰이기만 하면 되는 그릇이다. 그래서 쓰일 용도에 따라 딱 그만큼만의 모양대로 만들어졌다. 애초 꾸밀 생각이 없었으므로 조형미도 형식도 아무것도 구애되지 않았다.
아무 데나 쓰일 데만 있으면 그 모양대로 만들어지는 데 이골이 났다. 군더더기 없는 이 무형태의 조형미는, 그래서 현대 미니멀리즘 사조에 맞아떨어졌다. 옹기가 요즘 그릇으로 부활하고 있는 이유다. 옹기를 보러 징광옹기(전남 보성군)와 손내옹기(전북 진안군)를 찾았다.
글=이정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옹기는 그저 쓰이는 그릇
도자기란 원래 없던 말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예부터 우리네 그릇은 사기와 옹기 두 가지로 나뉘었다. 도기는 옹기를, 자기는 사기를 뜻한다. 사기가 고상한 취향을 반영한 ‘그저 예쁜 그릇’이라면, 옹기는 철저히 실용적인 ‘그저 쓰이는 그릇’이다. 그래서 사기보다 옹기의 형태는 훨씬 변화무쌍하다. 그릇 각각의 용도에 적합한 최적의 형태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장독·항아리·시루·솥·장군 등 같은 옹기를 부르는 이름만 수백 가지인 게 그래서다. 옹기장이들은 기교를 군더더기라 여긴다. 징광옹기 차정금(57) 대표는 “쓰이지 않는 옹기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했다. 손내옹기 이현배(48) 대표는 “옹기는 말 그대로 ‘적당한’ 물건”이라고 했다.
그 적당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옹기는 마치 공산품을 생산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빚어낸다. 필요한 이들에게 주문을 받은 뒤 가장 적합한 형태의 옹기를 한꺼번에 대량으로 굽는 것이다. 사기 장인들이 ‘불의 마술’이라고 부르는 독특한 문양은 옹기 장인들에게 ‘실패’를 의미할 뿐이다. 워낙 만드는 그릇의 크기가 컸기 때문이다. 큰 그릇은 형태의 아름다움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한 구성력이 더 중요하다. 이 때문에 장독은 크기가 커도 커보이지 않고, 작아도 작아보이지 않는다.
접시로, 화분으로, 의자로
옹기는 원래 지역마다 시대마다 쓰임새마다 달라졌다. 요즘 옹기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분야는 식기다. 원래 거칠어서 식탁 위에 놓기 꺼려지는 옹기가 식기로 살아남은 방법은 바로 그 ‘자연을 닮은 거침’을 포기하지 않은 데 있다.
“독을 빚을 때와 똑같은 흙으로 빚어요. 같은 색깔, 같은 질감이 나죠. 바로 이 자연스러운 흙 색깔과 모양 때문에 마치 자연에서 식사하는 기분이 들게 하죠.” 손내옹기 이 대표의 말이다. 그는 옹기 식기의 모양을 고속도로 휴게소와 플라스틱 그릇가게에서 찾았다고 했다. 일회용 컵라면의 경우 대개 끝이 둥글게 말려 있다. 테두리가 날렵하지 않고, 두툼한 형태는 옹기의 특징 중 하나다. 그는 “이러한 공산품 디자인에서 희망을 보았다”고 했다. 테두리가 두툼하고 입구가 널찍한 원통형 면기를 만들었다. 곤쟁이젓통을 반쯤 자른 모양이라 해서 반곤쟁이라고 부른다. 수프볼·샐러드볼도 만드는데 날렵하기보다 허리 부분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식으로 옹기다운 투박함을 그대로 남겨뒀다. 그런데 이를 제주 포도호텔·인천 하얏트리젠시호텔 등에서 주문했다. ‘세련된 그릇은 많아도 자연을 그대로 퍼온 듯한 그릇은 아마도 옹기뿐이어서 그런가 보다’라고 추측할 뿐이다.
옹기는 원래 식탁 위보다 바깥에서 쓰는 게 어울린다. 이에 수명을 다한 장독을 대신해 정원용 의자로 새 길을 찾았다. 징광옹기에서 빚어낸 의자는 새우젓통, 곤쟁이젓통을 뒤집어 놓은 형태에 안정감을 더하기 위해 지름을 넓혔다. 조형미를 더하기 위해 전통적인 굴뚝의 모양새를 살짝 넣었다. 옹기 의자는 장독의 느낌과 언뜻 닮았다. 여럿이 모여 있어도, 자연 속에 놓여도 지루하지 않고 잘 어울린다.
손내옹기의 화분도 역시 바깥자리에서 자리를 찾았다. 옹기는 원래 별난 흙이 아니라 주위에 흔히 볼 수 있는 흙으로 빚는 것. 그래서 흙을 담아도 자연스럽다. 시루 모양, 항아리 모양 모두 화분과는 잘 어울린다. 하지만 그는 “동남아시아에서 화분이 싼 가격으로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많이 만들지는 않는다”고 했다.
디자인을 입히면 미래는 밝다
이 대표는 1994년 장독을 손바닥만 한 크기로 줄인 ‘알단지’를 내놓았다. 한 명품회사의 주문을 받아 선물용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알단지는 그 뒤 여러 옹기업체에서 본떠 아예 상품으로 만들었다. 크기와 디자인만 조금 바꿨을 뿐인데 사람들은 열광했다. 그는 “옹기는 가장 자연과 닮은 그릇이어서 모두가 좋아한다”고 했다. 사회가 더 고도화될수록, 자연에 대한 향수가 깊어질수록 옹기는 더 힘을 발할 것이라고도 했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현대인의 쓰임새에 맞게 새로운 디자인과 용도를 찾아내는 것.
“예전에 호텔 로비에 있는 헨리 무어의 브론즈 작품을 보았어요. 그걸 보면서 옹기로 작품을 만들어 호텔 로비에 세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언젠가는 흙냄새나는 옹기 작품을 호텔 로비에 세워보고 싶습니다.”
지역마다 다른 옹기 생김새 강원도는 늘씬하고 충청도는 당당하고
옹기의 모양새는 제각각이다. 옹기는 ‘그때 그 장소’에 필요한 디자인으로 만들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의 형태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흔히 쓰이는 장독도 전라·충청·경기도 등 지역에 따라 모두 다르다.
지역에 따라 발효에 필요한 빛의 양과 온도가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역별 독 모양을 보면 목적에 맞는 디자인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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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부활을 주도하는 두 곳
유네스코서 ‘아름다운 수공예품’ 선정
요즘은 고온에 구워 잘 깨지지 않아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권혁재 기자 [shotgun@joongang.co.kr]
[중앙일보] 2010.09.27 00:02 입력 / 2010.09.27 00:02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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