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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행사

단순 담백한 일본 디자인 명품 총집합

11일까지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에서 열리는 ‘현대일본디자인 100선’전 

» 전시장 모습. 연주하기 쉽도록 프렛에 램프가 켜지는 이지 전자기타, 사일런트 바이올린 등의 디지털 악기와 혁신적 디자인의 스피커·앰프 등이 보인다. 사진 제공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디자인은 첨단의 유행이기도 하지만, 지난 삶의 자취가 담긴 기억이기도 하다. 우리는 잘 깨닫지 못하지만, 1960~80년대 지난 시절과 함께했던 이웃나라 일본의 디자인 명품들은 지금도 아련한 추억 속 이미지들로 남아 있다. 70년대 빵과 과자를 가득 싣고 학교 매점을 찾아와 코흘리개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난쟁이 삼륜차, 한국 ‘아줌마’들이 기를 쓰고 사들였던 코끼리표 전기밥솥, 80년대 청춘의 표상이던 워크맨과 혼다 오토바이 등등…. 모두 고도성장시대 일본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로 아시아에 널리 보급시켰던 등록상표 같은 디자인들이다. 
  
» 50여년째 원래 디자인을 유지해온 혼다의 오토바이 명품 ‘슈퍼커브 C100’. 사진 제공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소니 라디오·TV 등 미니디자인의 정수 보여줘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11일까지 서울 운니동에 있는 주한 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2층 실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현대일본디자인 100선’전은 아시아 현대 디자인의 맹주 자리를 지켜온 일본 디자인의 어제와 오늘을 엿볼 수 있는 전시회다. 2차세계대전 직후부터 50~6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쳐 2000년대까지 일본인과 아시아인들의 사랑을 받았던 낯익은 일본 디자인 명품들의 발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일본 디자인은 전통적인 선불교 사상에 바탕한 단순 담백한 ‘젠’(선) 양식과 작고 앙증맞으며 인간 친화적인 외형 등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비록 전시장은 좁고 작품들은 다닥다닥 장 속에 붙어 있지만, 출품작들은 20세기 기계문명 시대 예술과 일상의 만남을 꾀했던 서구 근대 디자인의 역사적 맥락과 특유의 전통 미학을 융화시킨 일본 디자인의 내공을 뿜어낸다. 
  

» 특유의 미니멀 디자인이 돋보이는 의자 등의 가구제품들. 사진 제공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전시장의 디자인 여정에서 먼저 눈길을 잡아당기는 것은 작고 기능성이 출중한 가전제품들이다. 1958년 나온 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 ‘TR-610’이나 소니의 1960년산 소형 텔레비전 ‘TV8-301’은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일본식 미니 디자인의 정수를 보여준다. 소니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국내 초창기 소형라디오의 디자인 모티브가 됐던 작품이다. 혼다가 1958년 내놓은 오토바이 ‘슈퍼커브(super cub) C100’은 국내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경량급 오토바이 디자인의 세계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단순한 외양에 내구성이 좋고 연비도 우수한 이 오토바이 모델은 6000만대 이상 팔렸고, 50년이 넘도록 거의 디자인이 바뀌지 않았다. 추억의 ‘빵차’, ‘과자차’로 기억에 선연한 마쓰다 K360 삼륜차는 전후 경제난을 고려해 최소 크기로 최대한의 출력을 갖춘 콤팩트카 디자인의 선구가 됐다. 
 
» 몇번의 가위질만으로 한장의 천이 옷으로 바뀌는 미야케 잇세이의 의복 ‘A-Poc’. 사진 제공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팬시상품을 연상케 하는 애교 섞인 귀여운 디자인은 미니화와 더불어 일본 디자인의 또다른 특징이다. 가전사 파나소닉의 2001년 히트작 소프트 다리미는 옷걸이에 옷을 걸어둔 채 다림질할 수 있도록 손잡이를 크게 디자인한 제품. 장난감처럼 앙증맞은 외양에 손의 접촉면을 최대한 돌출시킨 실용성까지 겸비했다. 작은 빨랫감들을 세탁하기 위한 파나소닉의 미니세탁기 기종인 ‘N-BK2’는 밝은 색상에 믹서기 같은 외형을 채택해 가벼운 애용품이라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모서리투성이인 고쿠요사의 ‘모서리지우개’(2001)는 잘 지워지는 모서리 면을 일부러 도드라지게 디자인해 편의성은 물론 사용하는 이의 미감도 배려한 수작. 일상에서 눈여겨보지 않는 사소한 부분들에 대한 일본인 특유의 관심이 디자인과 만나서 만들어낸 명품인 셈이다.   
 
이처럼 디테일에 세심한 일본 디자인 미학은 도예 강국의 전통을 드러내는 식기 세트 등에서 또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국내 식당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깃코만간장 식탁용 용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GK그래픽스에서 디자인한 이 간장병 모델은 일본 국내외에서 40년 이상 변함없이 사랑받고 있는 디자인으로 최소한의 형태미를 추구하는 미니멀 디자인 생활용품의 수작이다. 서구와 달리 생태 친화적인 일본의 미니멀 디자인은 담백하면서도 유기적인 자연 소재와의 만남을 부른다. 종이 파이프인 지관을 이용해 서로 연결시키며 선반, 물건 장 등을 만드는 ‘지관랙’이나, 세계적인 디자이너 요시오카 도쿠진의 걸작인 ‘벌집형 종이의자’(허니팝) 등이 나왔다. 특히 종이를 쓴 1인용 소파 ‘허니팝’은 접혀 있는 것을 아코디언처럼 펼쳐서 사용하는 독특한 얼개로, 형태미는 물론 가죽 제품에 뒤지지 않는 내구성을 자랑한다는 평가다. 이밖에도 단순한 가위질 몇번으로 한장의 천을 패션 의상 모드로 탈바꿈시키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미야케 잇세이의 의복 디자인 ‘A-POC’, 유선형 열차 디자인의 교과서가 된 일본 신칸센 시리즈, 헤드폰을 사용해 소음을 끼치지 않고 연주를 즐길 수 있는 ‘사일런트 바이올린’ 등이 관객들을 맞는다. 
 

» 1. 단순한 디자인이 돋보이는 초창기 소니의 미니라디오 ‘TR-610’. 2. 세계 최초의 휴대용 트랜지스터 텔레비전인 소니의 ‘TV8-301’. 사진 제공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인간에 대한 배려·현장 체험 중시 등 돋보여

일본 디자이너들은 인간에 대한 배려와 ‘들판에 나가 생활을 배우는’ 식의 현장 체험을 전통적으로 중시해왔다. 짚과 칠기 디자인에 심취한 일본의 중견 디자이너 미야자키 기요시는 “일본에서 19세기 디자인을 뜻하는 용어로 고안된 ‘도안’이란 말 자체가 삶 속에서 꿈을 실현시킨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 바 있다. 일본의 근대 문화사에서 디자인은 인간을 생각하고 삶을 풍성하게 하는 꿈의 기술로 인식되었다는 이야기다. 일본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의장은 마음의 꽃’이라는 격언을 즐겨 쓰는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이런 배경까지 곱씹는다면, 일본 디자인계의 숨은 전통과 저력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이번 전시를 체험하는 눈맛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02)765-3011.

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사진 제공 주한일본대사관 공보문화원

[매거진 esc] 노형석 기자 
기사등록 : 2010-09-09 오전 09:29:56  기사수정 : 2010-09-11 오전 10: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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