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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위기의 건축업계, 다시 디자인으로

[인터뷰]이형재 정림건축 디자인총괄 사장


-아틀리에 실험성과 대형사의 시스템 융합…디자인실 만들어 ‘숙성된 작품’만들터

 공공·민간 건축시장의 동반 위축으로 건축업계의 시름이 깊다. 대형부터 중소형까지 모든 건축사사무소들이 위기극복 방안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해법은 저마다 다르다. 대규모 인력조정이라는 극약처방을 내린 곳도 있고, 강력한 비용절감 프로그램을 택한 곳도 있다. 일부 회사에선 매각을 검토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특정 회사의 경영난을 두고 유난히 각종 ‘설(說)’들이 난무한다. 그만큼 위기의식과 불안감이 팽배하다.

◇"Back to Basics"

 위기탈출의 해법은 뭘까. 그 답을 찾아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정림건축 종합건축사사무소를 방문했다. 올해로 창립 44년이 된 이 회사는 아틀리에(작업실·소형 건축사사무소를 지칭)의 실험성과 대형 건축사의 시스템을 한데 잘 버무려 디자인 경쟁력을 키워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림건축의 디자인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이형재(55·사진) 사장을 만났다. 그의 직함은 디자인 프린스펄(Design principal). 수석 디자이너로 각각 40~50명으로 구성된 총 7개 설계본부에서 추진 중인 각종 프로젝트의 조율을 맡고 있다. 해당 프로젝트에 맞는 최적임자를 찾아내는 것도 그의 몫이다. 건축디자이너의 ‘맏형’ 역할을 하고 있는 그가 찾은 해법이 궁금했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싱거웠다.

 “기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s).”

 맞는 얘기다. 혁신을 통해서 성공한 회사와 실패한 회사의 차이를 살펴보면 결국 기본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라는 작은 문제에서 시작됐다. 새로운 혁신과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선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성공한 경영인들과 세계적 경영석학들은 누차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사장이 말하는 기본은 곧 디자인이다. 건축사사무소의 출발이 디자인이라고 본 것이다.

 그는 우선 건축시장의 변화를 탓하기 전에 건축인들이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기가 외부에서 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이미 내부에서 시작됐습니다. 고객 제일주의가 많이 부족합니다. 발주처에는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고 약속해놓고선 정작 현장에선 인력과 시스템의 한계로 최고의 작품을 못내놓고 있는 게 현실이죠.”

◇PD→DP→디자인 프린스펄

 정림건축은 최근 소폭의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그 중 주목할만한 것이 ‘디자인실’ 강화다.

 보통 한 프로젝트가 결정되면 이를 프로젝트 디자이너(PD)가 맡아 소속 팀원들과 함께 진행한다. PD는 디자인 실무와 현장 경험을 두루 갖춘 경력 10년 안팎의 젊고 능력있는 건축사다. 정림건축은 본부별로 10여명의 PD를 두고 있다. 실무는 PD가 맡지만 이를 총괄하는 것은 각 본부에 있는 디자인 파트너(DP)다. 여기에 디자인 프린스펄이 가세해 스키메틱(schematic·도식) 단계부터 수차례 리뷰를 통해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간다.

 이처럼 젊은 건축가인 PD 그룹과 경험이 풍부한 DP, 전 프로젝트를 아우르는 디자인 프린스펄로 이어지는 정림건축 특유의 설계 시스템 중심에 디자인실이 있다. 디자인 프린스펄 직속으로 운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동안의 작품이 ‘2%’ 부족했다고 보고 이를 채우겠다는 것이다. 건축 디자인의 창의성과 완성도를 높여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전략이다.  

 이 사장은 이 과정을 “디자인이 숙성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대형조직이 보유한 인적자원의 경험과 지식을 충분히 보태면 좋은 건축, 건강한 건축이 탄생한다”며 “아틀리에 조직이 갖는 실험정신과 대형 조직의 힘이 함께 발휘될 수 있도록 돕는 곳이 바로 디자인실이다”고 했다.

 정림건축은 지난 1967년 김정철·김정식 두 형제 건축가에 의해 세워졌다. 이들은 ‘건강한 공간환경을 만들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꿨다. 특히 개인의 능력과 집단의 다양성을 융합한 ‘조직 설계’를 정립했다. 특출난 개인을 중심으로 모인 건축가 집단(아틀리에)이 아닌 개별 건축가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조직·협업 설계를 강조한 품질경영시스템을 처음 도입한 것이다. 오늘날 대형 건축설계사들의 탄생에도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다. 그만큼 정림건축에서 전통적으로 조직의 힘은 세다.

청와대 본관 춘추관 
    
국립디지털도서관


◇전통건축 재해석, 교회건축의 대가

 정림건축은 전통건축의 현대적 해석에서도 빛을 발했다. 이 사장의 공헌이 컸다. 대표 작품은 청와대 본관 춘추관<사진1>. 그는 “폭 100m, 아파트 10층 높이의 전통한옥이 그전엔 없었기 때문에 청와대 본관 춘추관을 설계하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건축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국건축가협회 북한건축연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지난 2001년부터 평양을 20여차례 방문했다. 그는 “인민대학 도서관의 스케일을 보고 깜짝 놀랐다”면서 “이른바 조선식 건축양식을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평양과학기술대, 황해도 봉산군학교 살림집 등 북한 건축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대학 등 교육 연구시설 프로젝트도 다수 수행했다. 이화여대 100주년 기념도서관, 단국대 율곡기념도서관, 고대 서창도서관, 숭실대 제2도서관, 동국대 중앙도서관 등 대학 도서관 설계에서는 도서관의 특성인 공간효율과 열람환경을 최적화한 설계로 주목받았다.

 특히 국내 최초의 디지털 공공도서관인 국립디지털도서관<사진2>은 기존 중앙도서관과의 배치와 지붕을 광장마당과 연계한 친환경적 요소 등이 호평을 받기도 했다.

 이형재 사장은 국내 교회건축에선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처음 설계를 맡은 예닮교회는 처음으로 부채꼴의 예배공간을 시도하는 등 한국교회 건축에 있어서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교회건축은 내가 가진 달란트(재능)를 이웃과 나눈다는 취지로 시작했는데 어느새 50여개가 넘었다”면서 “교회처럼 예배당과 교실, 식당, 체육관 등 복합적인 기능을 가진 공간도 흔치 않다. 이런 건축공간을 설계해 본다는 게 젊은 건축가들에겐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1년에 1~2개 정도는 진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사장은 정림건축의 창립 반세기를 앞두고 결코 긴장을 늦출 수 없다고 말한다.

 “사회는 급변하고 있고 정림과 비슷한 규모의 대형건축사들 간의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도 실용성과 창의성을 갖춘 디자인을 내놓을 수 있도록 새로운 조직의 변화를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형재 사장은 중앙대학교에서 건축수업을 마치고 1979년 정림건축에 입사해 2007년 사장으로 승진했다. 대표작품으로는 청와대 본관 춘추관, 국립디지털도서관, 평양과학기술대학, 이화여대 100주년 기념도서관 등이 있다. 대한민국 건축대전 초대작가이며 제26회 국전특선 한국건축가협회 작품상,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현재 중앙대 건축학부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김태형기자 kth@

기사입력 2011-09-19 16: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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