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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하얀 옷에 그린 사랑의 메시지…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티셔츠 디자인 화가 김지희

27세. 나이에 걸맞지 않은 넘치는 카리스마. ‘천재’ ‘신동’ 정도의 단어가 무색할 정도의 노력파.

크지 않은 체구는 바람 불면 날아갈 듯 연약해 보였다. 인터뷰 도중 그의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세계를 무대로 한 젊은 화가의 힘을 느끼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국화와 팝아트를 접목해 예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김지희씨.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작품에만 온 힘을 쏟아온 그가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의류업체 제너럴아이디어 주축으로 타 분야 예술가와 함께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티셔츠 디자인 작업에 참여한 그를 지난 19일 서울 이화여대 인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아프리카 아이의 슬픈 눈

‘아이의 눈엔 이슬이 맺혔다. 그 눈은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검은 피부의 그 아이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물, 물이었다.’

김씨는 얼마 전 물이 없어 고통스러워하는 아프리카 어린이의 참상을 우연히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통해 접하곤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아프리카에 가보지 못해 그곳에 대해 잘 몰랐죠. 웅덩이에 고인 물, 썩은 물밖에 마실 게 없어 어린 나이에 죽어가는 어린이가 많다는 것. 제게는 큰 충격이었습니다.”

기독교 국제구호단체 굿네이버스를 통해 후원하던 캄보디아 아이 사진을 꺼내들었다. 많지 않은 돈인데도 고맙다고, 열심히 살겠노라고 활짝 웃는 사진과 함께 편지를 보낸 그 아이를 떠올리니 아프리카 아이들의 상황은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조그만 도움이 그들에겐 큰 힘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는 환경 때문에 꿈을 펼쳐 보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 지구 저쪽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 무렵 제너럴아이디어의 최범석 디자이너가 김씨를 찾았다. 월드비전이 아프리카 지역에서 진행하고 있는 우물파기 사업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 사진, 미술, 타투 등 각 분야의 예술가가 모여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티셔츠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전 세대 예술가들은 이 같은 콜래보레이션(collaboration·예술 분야 간 협업)에 관대하지 않았다. 예술 분야 각각의 순수성이 훼손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김씨는 달랐다. 제의를 듣자마자 흔쾌히 응했다. 다른 무엇보다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맑은 물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었기 때문.

“올해 초 굵직한 전시회가 많아 정신없이 바빴어요. 3월 초에는 세계 최대의 ‘아트 페어 뉴욕 레드닷 아트 페어’에도 참가해야 했죠.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시간을 쪼개고 잠을 줄여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나올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김씨는 디자인의 제목을 ‘Desire to LOVE(사랑에의 염원)’라 정했다. 흰색 바탕 티셔츠에 영어 단어 사랑(LOVE)을 써 넣고 알파벳 ‘O’를 하트 모양으로 했다. 그 안에 밝게 웃는 흑인 아이의 얼굴을 그렸다.

“먼 땅에서 물이 부족해 오염된 물로 연명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자는 메시지를 디자인에 반영했어요. 온기가 간절히 필요한 아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전달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이번에 제작한 티셔츠 판매로 얻어진 수익금은 아프리카 우물 사업에 쓰인다.

융통성을 버리자 성공이 다가왔다

김씨는 어린 시절 취미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취미로 잡은 붓이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친구가 될 거라고 처음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한 번은 미술 선생님과 함께 그림을 그리다 옆에 처음 보는 작품이 있기에 그대로 따라 그렸어요. 유명한 작품인 줄도 몰랐죠. 그런데 선생님께서 화들짝 놀라시더군요, 어린애가 한 번 본 그림을 똑같이 그려 내는 게 충격이었나 봐요.”

그가 세계적인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 건 그 즈음이었다. 단순히 미적 감각과 재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 꿈을 향해 열심히 뛰어가겠다는 다짐을 했다.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게 됐죠. 그때부터 정말 열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말이죠.”

그는 단 한 번도 자신과 타협하지 않았다. 안 그려진다고, 피곤하다고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 그의 사전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를 다그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결혼식을 다녀오든, 상가를 다녀오든 매일 최소 10분이라도 그림을 그렸을 정도예요.”

수업이 시작되는 오전 9시보다 4시간이나 빨리 학교에 가 그날 그릴 그림을 미리 그린 뒤 수업에 임했다. 남들이 한 번 할 때 최소 두 번 이상을 해냈다. 악바리도 그런 악바리가 없었을 게다.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재능 나눔의 기쁨

이번 아프리카 어린이 돕기 티셔츠 디자인 작업 참여는 꾸준한 봉사활동의 연장선이다. 그는 이화여대 동양화과에 입학하자마자 인근 보육원을 찾아 그림을 가르쳤다.

“부모님이 봉사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됐죠. 또 남보다 좋은 교육을 받았으니 그 성과를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컸고요.”

대학교 2학년 때 아이들과 보육원 벽에 그림을 함께 그려 넣던 김씨는 한 아이의 말을 듣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언니랑 그림 그리는 게 너무 좋아요. 저도 나중에 언니처럼 화가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거예요.”

최근 유행하는 ‘재능 기부’의 기쁨을 일찌감치 경험했던 것. “기부, 봉사. 저도 처음엔 어렵게 생각했어요. 어렵다고만 생각할 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가진 그 작은 것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몰라요. 새 작품 구상에 자극과 도전이 되기도 하고요.”

그는 2007년 일본 전일전(全日展) 예술상을 받았고 올 초 제6회 청작미술상 최연소 수상자가 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 반열에 오른 그에겐 두 가지 꿈이 있다.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든 그렇지 않든 진정성을 가지고 오랫동안 예술적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화가가 되고 싶다는 것이 첫 번째다. 다른 하나는 예술적 재능을 많은 사람과 꾸준히 나누며 자신이 받은 가르침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는 것이다.

“제 롤 모델인 원문자 교수님, 무라카미 다카시와 같이 훌륭한 작가가 되어서도 주변을 먼저 살피고, 재능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글 조국현 기자·사진 홍해인 기자 [국민일보] [2011.03.23 18: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