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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시론] 디자인이 미래 생존 전략이다

▲ 정경원 서울시 문화관광디자인본부장 
 
얼마 전 독일 에센에서 ‘2011 레드 닷 디자인 공모전’의 심사회가 열렸다. 전 세계 60여개 나라에서 4400여점이 출품돼 이틀간 심사가 진행됐다. 출품작은 지난해에 비해 4% 정도 늘어났다. 이는 세계적인 경기 불황에도 제품의 디자인 경쟁이 아주 치열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경제가 어려울수록 구매자들의 선택 기준은 더욱 까다로워진다. 따라서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의 마음이라도 사로잡아야 한다.

가정용품과 주방기기를 비롯해 사무용품, 컴퓨터는 물론 승용차와 중장비 등 다양한 제품들을 대상으로 디자인 수준에 따라 최우수상, 입상, 입선을 가려내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임무다. 제품 부문별로 필자를 포함해 각 3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혁신성, 심미성, 기능성 등 여덟 가지 디자인 선정 기준에 따라 심사했다.

국적과 배경이 다른 심사위원들이 함께 디자인의 우월을 가려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숙련된 심사위원들은 뛰어난 디자인을 선별하는 데서 쉽게 공감대를 형성한다. 한눈에 호감이 가는 형태와 색채, 사용성 등을 가려낼 수 있다. 또 사용자 입장에서 세심하게 살펴보면 편의성과 안전성 등의 우열이 판별된다.

심사를 하는 동안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라는 속담이 머릿속에서 내내 맴돌았다. 수많은 제품 중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끄는 것들은 하나같이 형태와 기능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흔히 “아름다운 형태에 치중하다 보니 기능이 약해졌다.”라거나, “기능에 충실하려다 보니 형태가 무미건조해졌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디자인을 잘못했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19세기 중엽 미국의 조각가 호레이쇼 그레노는 “사물의 형태적 특성은 곧 어떤 기능이 있는지를 나타내 주는 증거이며, 아름다운 형태는 그런 기능이 완벽하게 발휘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약속이다.”라고 주장했다. 빠른 속도를 자랑하는 새들과 물고기들의 날렵하고 멋진 형태는 공기와 물의 저항을 가장 적게 받도록 유선형으로 진화된 결과라는 것이다. 디자인도 어찌 보면 생존전략의 결과이다.

또 “디자인의 가장 훌륭한 교과서는 자연”이라는 표현은 곧 제품을 디자인하는 과정이 자연물의 진화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존에 꼭 필요한 부분은 강화하고, 불필요한 것은 과감하게 퇴화시키는 진화의 법칙이 바로 디자인의 원리이다. 수많은 출품작 중에서 탁월한 디자인을 가려내는 것은 제품을 만들 때 진화의 과정이 얼마나 충실하게 이루어졌는가를 판별하는 작업이다. 제품이든 건물이든 하나의 인공물이 기능적으로 나무랄 데가 없다는 것은 단지 탁월한 디자인을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특히 한눈에 그 기능이 완벽하다는 것을 약속해줄 형태를 만들어 내려면 부단히 갈고 다듬어야 한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 ‘쓸모’와 ‘아름다움’의 융합은 치열한 진화 과정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사실을 직시하고 실천하는 기업들만이 탁월한 디자인의 날개를 달고 세계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한 품목당 200유로(약 30만원)라는 출품료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출품작이 크게 늘어나는 것은 디자인 경쟁이 점점 더 심화됨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우리 기업의 제품들은 기능적으로는 큰 무리가 없지만, 매력적인 특성이 약해서 늘 “2%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중국·터키 등 신흥 공업국들의 디자인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우리의 뒤를 바짝 따라붙고 있어서, 이러다가 정말 기술력에서는 선진국에 밀리고 디자인에서는 후발 개발도상국에 쫓기는 신세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적잖다.

디자인은 사치스러운 것이라느니, 겉멋만 내는 것이라는 등 시대착오적인 논쟁이 더 이상 우리 디자인 수준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해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우리의 미래 경쟁력을 담보해줄 수단으로 디자인을 적극 활용하려는 의지와 지혜가 절실한 시점이다.

서울신문 | 2011-03-11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