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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8〉이익과 분배

현실세계선 상업화와 타협 불가피…피카소조차 후원자 관계 위해 노력

죽어라 일해서 당신 배나 불려준 꼴이라니!

현대미술 시장의 역사적인 순간이었던 1973년 10월 18일 소더비경매장 경매에 부쳐졌던 스컬의 컬렉션은 224만2900달러의 판매액을 기록하며 마감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날 미국의 추상표현주의부터 팝아트를 이끌었던 대표작가 중 한 명이었던 라우션버그는 그동안의 후원자이며 컬렉터였던 로버트 스컬과 결별했다

◇‘살아있는 자의 마음속에서 불가능한 육체적 죽음’ 데미언 허스트 1991년 작

불과 하루 전의 인터뷰에서 스컬 부부는 다른 지원활동이 전혀 없던 어려운 시기부터 젊은 작가들을 후원해 온 기적 같은 존재라고 칭찬해 마지않던 라우센버그가 경매가 끝나자마자 자신의 구세주였던 컬렉터 스컬을 거칠게 떠밀며 언성을 높인 것이다

자자 진정해 이 경매로 자네 작품 가격도 엄청나게 오를 게 아닌가

라우션버그는 스컬의 변명 따위엔 아랑곳없다는 듯이 씩씩대며 스컬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훗날 그는 자신이 술에 취해 있었다고 인정했지만 두 사람 사이를 회복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몇 년이 지난 후 캘리포니아에서 그는 다른 작가들과 함께 음악이나 문학 예술분야처럼 시각예술 작품도 재판매가 될 경우 작가에게 로열티를 지급해야 한다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데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얼마 전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 수면으로 올라왔던 바로 그 추급권 이야기다 캘리포니아주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아직까지 유일하게 추급권을 인정하는 곳으로 1977년부터 판매 가격이 1000달러 이상인 예술 작품은 재판매 시 5%의 로열티를 작가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규정이 생겼다

1960년대 팝아트는 아방가르드를 상업적으로 적극 활용하면서 상업주의를 예술에 끌어들이는 것조차도 아방가르드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무명의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후원하며 부를 축적해온 스컬은 앤디 워홀에게 대중의 흥미를 끄는 법을 직접 지도받으며 광고에 엄청난 노력을 쏟아부은 덕분에 택시회사 운영으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캠벨 수프 캔’ 앤디 워홀 1962년 작 508x406 cm 워홀이 캠벨 스프 캔을 전시했을 때에는 “29센트에 진품을 가져가세요”라는 낙서가 남겨지기도 했다

스컬이 자신의 아파트에 공간이 부족해 작품을 처분할 수밖에 없다고 너스레를 떨며 자신의 컬렉션 중 50점을 소더비 경매에 내놓을 것을 예고했을 때부터 이 경매는 화제를 불러 모았다 매스컴을 통해 대대적인 광고가 만들어졌고 컬렉터들을 끌어오기 위해 LA 스위스 등으로 순회전시가 기획되었다 그리고 컬렉터들은 현대 미술 작품을 IBM 주식처럼 높은 차익이 보장되는 투자대상으로 여기며 높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한쪽에서는 경매회사와 스컬이 합작해 예술가들을 노골적으로 착취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미술 미평가 바바라 로즈는 뉴욕 매거진에 기고한 글에서 불안정한 증시 환율변동과 인플레이션을 피해 미술계로 몰려든 기업형 투자자들이 미술작품을 국제투자거래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으며 한때 라스베이거스나 몬테카를로의 도박장에 몰려들었던 사람들을 미술품 경매장으로 그러모아 예술과 문화를 애호하는 척 허세를 부리게 한다고 썼다

소더비경매장 밖에는 시위도 넘쳐났다 부자 히피인 스컬이 택시운전사들을 등친 돈으로 작가를 농락한다는 피켓을 든 로버트 스컬 소유 택시회사의 운전사들과 지역 예술가들은 스컬을 풍자하는 거리공연을 펼치기도 했고 경매장 입구로 몰려들어 출입하려는 사람들 앞을 가로막아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스컬의 제막식’ 거리 연극 전단지 스컬이 수프 캔을 들추며 나오는 모습으로 풍자되어 있다 열악한 노동조건과 급여에 불만을 가졌던 운전사들이 몰던 택시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컬의 엔젤’이라고 불렸다
 
경매장 내외의 이런 모습이 담긴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자 뉴욕 타임스는 경매를 혼란 그 자체였다고 묘사하며 현대미술을 제작하거나 소장하고 매매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게 될 것이라고 했고 LA타임스는 이 다큐멘터리가 호화로운 부패와 타락이 떨어질 지옥의 나락으로 다녀온 여행기를 감상한 듯하다고 했다

이 경매에서 라우션버그의 작품은 각각 8만5000달러 9만달러에 팔렸다 십여 년 전에 스컬이 900달러와 2300달러에 구입한 작품이었다 제스퍼 존스의 작품은 1만500달러에서 24만달러 사이 톰블리는 750달러에서 4만달러 워홀의 꽃은 3500달러에서 13만5000달러로 몸값을 올렸다

당연히 모든 작가들이 라우션버그나 시위대에 섞인 무명작가들처럼 이 같은 상황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건 아니었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스컬의 후원 덕분에 명성을 얻은 예술가들은 경매의 성공적인 마무리로 작품 값이 급격히 상승하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지만 로버트 스컬이 전시를 통째로 구입하기 전엔 단 한점도 팔지 못했던 제스퍼 존스는 경매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판화를 찍던 일손을 잠시 멈추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그리고 최근 삼성의 비자금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더욱 유명해진 행복한 눈물의 작가 리히텐슈타인은 경매장에서 소동을 벌인 라우션버그를 두고 그 친구 도대체 뭐가 문제야? 작품 값이 떨어지기라도 했어?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컬렉터나 갤러리가 작가들을 착취해 지나친 이익을 챙기고 있다고 생각한 이는 소수가 아니었지만 전체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가난한 작가들이 모여 살던 소호지역에서는 검증된 작가들에게만 작업실을 임대하겠다는 건물주들이 생겨났고 작품성이 아니라 후원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작품을 전시해주는 갤러리들이 생겨나면서 예술가들은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바바라 로즈가 쓴 것처럼 더 이상 누구도 순진하게 굴 수는 없었던 거다 후원자와 잘 어울려 다니고 작품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디자인된 파티에 얼굴을 내밀어 주며 그를 기쁘게 한다면 예술가는 그가 원하는 것을 받게 되는 것이다

1914년 프랑스에서는 곰의 가죽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컬렉터 그룹의 소장품 경매가 있었다 사업가였던 앙드레 르벨을 중심으로 모인 13명의 컬렉터는 1904년 곰의 가죽을 결성해 10년 동안 엄청난 양의 작품을 사 모았다 그들은 주로 화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거래를 했고 10년 후 무조건 팔겠다는 생각으로 수집을 했다 이들은 투자를 목적으로 작품을 수집하러 다니는 것을 공공연하게 알리고 다녔고 작품을 투기해 이익을 챙기려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14년 계획했던 대로 컬렉션의 경매가 이뤄졌을 때는 상황이 반전되었다

이 컬렉션도 고흐고갱 등 인상파의 작품에서 피카소나 마티스에 이르는 동시대의 작가들 작품 145점이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판매금액의 20%라는 획기적인 금액을 작가에게 돌려주었다 프랑스에서 추급권이 제정된 것은 그로부터 6년 후인 1920년에 이르러서였다 시인이자 미술 평론가였던 아폴리네르는 자신들의 평론이 해주지 못한 것을 이날의 경매가 대신해 주었다고 생각했다(피카소 만들기 30쪽 피츠제럴드 지음 이혜원 옮김 다빈치) 피츠제럴드는 곰의 가죽 활동을 두고 작가의 명성이 만들어지는 이면에는 평단의 인정과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톱니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고 썼다

◇‘폴리스 가제트’ 윌리엄 드 쿠닝 1955년 작

피카소가 화상은 적이라고 했듯 많은 예술가들이 딜러나 갤러리를 경계했지만 작품을 팔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데미언 허스트가 그 악명 높은 다이아몬드 해골을 1억달러에 내놓았을 때 그는 그 가격이 절대 비싸지 않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답을 했다 작가에게 작품을 살 때 컬렉터는 돈을 조금밖에 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후 그 작품을 경매 등의 제2시장에 다시 내다 팔 때 그는 매우 많은 돈을 번다 [] 이건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 이런 순환이 만들어졌는가? 예술은 처음부터 비싸야만 한다 주머니가 두둑한 신사들이 제2시장에서 많은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시장미술의 탄생 198쪽 심상용 지음 아트북스) 게임에서 이긴 사람의 말은 항상 옳은 법이다 허스트는 자신의 초기 작품 12점을 780만파운드를 주고 다시 구입하기도 했다

허스트는 광고 재벌 찰스 사치의 지원을 받아 상어를 제작한 것은 1991년이었다 6000파운드가 상어 가격이었고 포획에 4000파운드 냉동 포장해 런던으로 운반하는 비용은 2000파운드였다 찰스 사치는 허스트에게 5만파운드를 지불했다 그리고 여러 번의 재판매를 거쳐 2008년 상어의 가격은 800만달러를 기록했다 상어를 구입한 스티브 코헨은 앤디 워홀의 작품을 2500만달러에 드 쿠닝의 작품을 6350만달러에 구입하기도 했다 스컬이 1973년 경매에서 18만달러에 팔았던 바로 그 그림 폴리스 가제트였다

외고집으로 상업화와 타협하지 않으며 힘들게 살아간 작가들의 인생은 신화화되어 작품을 판매할 때마다 따라다니기도 한다 작품의 예술성과는 별개로 작가가 생전에 아니면 활동 초기에 가난하고 힘겹게 살았거나 유럽이나 미국의 대도시로 피난을 와서 작품 활동을 하기 전에는 전쟁이 있던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는 사실 가정폭력에 노출되었던 어린시절 등이 작품 가격을 올리기에 유용한 요소가 되어왔고 우리는 순진하게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 그런 사실들을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발굴된 작품은 컬렉터와 전문 딜러 사이의 판매와 재판매를 통해 가격을 올리게 된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입력 2011.02.13 (일) 11:12, 수정 2011.02.13 (일) 15:41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