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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6〉예술 속의 소란과 싸움

작가와 이론가, 목적·접근법 차이때문 불협화음은 당연

1982년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에서 오픈을 얼마 앞두고 작품 설치가 한창일 무렵 국제관의 커미셔너였던 프랑스 미술비평가 장 클레의 따귀를 후려친 이가 있었다. 이탈리아 화가 리카르도 톰마시 페로니였다. 톰마시 페로니는 쉰이 조금 안 되는 나이의 점잖은 화가였고 늘 깨끗하고 세련된 더블재킷 수트에 금 체인이 달린 조끼를 갖춰 입는 신사였다. 유년 시절 그가 그렸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작을 사람들이 실제 원작으로 착각했을 만큼 뛰어난 그림 테크닉을 자랑했던 작가였다. 그는 콧수염을 멋지게 다듬은 얼굴에 은으로 된 만년필을 가지고 다녔고 고전적인 스타일의 그림만큼이나 고풍스런 1700년대 빌라에 살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예의바른 중년 신사인 그가 저명한 프랑스 비평가의 뺨을 후려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장 클레 역시 이전에는 이와 비슷한 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었던 인물이었다.

◇‘갈레리아의 소동’. 아리엘라 비다치의 지도하에 무용팀이 보초니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2009년. 사진:퍼포먼스 장면. 레푸블리카

사건의 발단은 톰마시 페로니와 함께 특별전에 초대받은 스페인의 대표적 추상표현주의 화가 안토니 타피에스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부터였다. 타피에스는 1952년 이후 수차례에 걸쳐 베니스 비엔날레에 출품해 온 노장이었다. 그는 자신과는 완전히 반대격인 톰마시 페로니와는 함께 소개될 수 없다고 버텼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소설가 레오나르도 샤샤가 톰마시 페로니의 작품세계를 설명하며 “한 세기 전에 태어났다면 프란체스코 하이에즈처럼 그렸을 테고, 1600년대에 태어났다면 다비드 테니에르나 얀 브루겔처럼 그렸을 것”이라고 칭찬했으니 타피에스가 공통점을 찾기는 어려운 화풍이었던 거다. 그는 자신의 평생 작업을 통해 벗어나려고 했던 구식 그림을 그리는 톰마시 페로니가 자신과 같은 급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되어 개인전을 하는 게 못마땅했다.

두 작가가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던 중 때마침 자리에 있던 장 클레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러 끼어들었다. 그러다 상황은 장 클레와 톰마시 페로니의 언쟁으로 번졌고 급기야는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작가가 장 클레의 언사를 참지 못하고 뺨을 친 것이다. 톰마시 페로니는 그러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던지 작품을 모두 철수해 내려가 버렸다. 훗날 장 클레가 작가에게 화해를 청하며 작가에게 감정이 있었던 게 아니라 톰마시 페로니를 비엔날레에 초대한 이탈리아 비평가이며 조직위원 멤버였던 베닌카사에게 불만이 있었던 것이라고 변명을 했지만 둘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사실 어떤 작품의 존재 가치가 더 큰가, 누가 더 나은 예술작품을 하느냐는 해답이 없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둘 다 초대작가로서 동일한 명분을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식의 분란이 일어난다면 누가 남고 떠나고는 다분히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비엔나 전투전’, 톰마소 페로니 1986년 작. 제40회 비엔날레에 출품했다가 시비가 붙어 철거한 작품 중 한 점이다.

에밀 졸라가 세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쓴 것처럼 예술가들은 “훨씬 민감한 피부를 가져서 (…) 손가락만 대도 아프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예민한 존재들이라 별것도 아닌 것에 발끈하는 경우도 많지만 이론가들이라고 한 치라도 양보할 리는 없다. 사실 서로 다른 예술관을 가진 작가들이나 이론가들 사이에 종종 일어나는 불협화음은 당연한 현상이다. 예술 경향의 이론적 바탕과 틀을 마련하거나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려는 이론가의 입장과 실질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의 입장은 엄밀히 목적과 접근법이 다르기 때문에 크고 작게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서로의 입장을 조정하는 과정은 때때로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화가이면서 시인이었던 아르덴고 소피치는 1910년 베니스에서 미래주의 예술가 보초니의 전시를 처음 접하고 그 전시는 “바보 같고, 흔해빠진, 전혀 미래주의적이지 않았다”라고 썼다. 다른 글에서는 미래주의가 폭력적이고 전투적인 행동강령 하에 움직이는 것을 지적하며 보초니는 무정부적이고, 선동적이고, 초현대적이라는 소리는 말뿐인 얌전한 화가라고 약을 올리기까지 했다.

몇 개월이 지나 본격적으로 시작된 움베르토 보초니와 카를로 카라, 루이지 루솔로 등의 역동적이고 속도감 넘치는 진정한 미래주의적 전시를 밀라노에서 접한 후에도 소피치는 의견을 바꾸지 않았고 파피니와 프레졸리니가 피렌체에서 발행했던 문학잡지 ‘라 보체’에 쓴 기고문에서 이 전시를 끔찍하게 혹평하기에 이른다. 결국 초여름 6월의 마지막을 하루 남겨두고 미래주의의 지도자였던 마리네티를 비롯해 카라, 루솔로와 함께 보초니는 소피치와 담판을 지으러 요란스럽게 피렌체로 내려갔다. 이때가 바로 밀라노와 피렌체에서 각각 활동하던 이들이 처음으로 대면한 날이었다.

지역의 인텔리들이 모여 토론을 벌이던 ‘주베 로세’라는 이름의 카페에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혹시 당신이 소피치요?” “그렇소만…?” 당사자를 확인한 보초니는 상황을 파악할 틈도 주지 않고 자신보다 훨씬 큰 체격의 소피치의 뺨을 손등으로 가격해 쓰러뜨렸다. 소피치가 쓰러지는 것을 본 동료들이 흥분해 덤벼들면서 싸움은 커졌고 밀라노 미래주의자들을 카페로 안내한 시인 팔라체스키는 겁에 질려 카페 안쪽으로 숨듯이 도망쳐 버렸다. 성질이 돋은 소피치는 지팡이를 마구 휘둘렀지만 싸움은 신고를 받은 경찰의 중재로 끝이 났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급습을 당한 것이 분했던 소피치 무리는 다음날 아침 마리네티 일행을 잡으러 역으로 달려갔다. 소피치의 절친한 동료였던 프레졸리니는 “우리가 바로 대응하지 않으면 그놈들은 우리가 몸에 소변을 갈겨도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거요”라며 격한 표현만큼이나 거세게 마리네티를 공격했다.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던 카라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마리네티에게 달려들어 머리를 물어뜯으려고까지 했었다. 두 번째 싸움은 몸싸움에서 언쟁으로 이어졌고 긴 토론 끝에 그들은 서로가 다른 지역에서 다른 방법으로 접근하긴 했지만 결국은 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두 무리 모두 오래된 것을 타파하고 젊고 혁신적인 생각으로 채워 넣어야 한다는 하나의 가지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빨강과 검정’, 안토니 타피에스 1981년 작.

소피치와 ‘라 보체’지의 파피니, 프레졸리니 등은 마리네티가 1909년 프랑스 ‘르피가로’지 1면에 ‘미래주의 선언’을 실었을 때부터 큰 감명을 받고 그의 사상을 추종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미래주의 선언’에 나열된 대로 “속도야말로 새로운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했고 ‘속도’가 세상을 변화시킨다고 확신했다. “뱀같이 두꺼운 파이프로 장식한 덮개를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는 폭발하듯 숨을 내쉬고, 기관총 위를 달리듯 으르렁거리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아름답다”고 믿은 그들에겐 당연히 싸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미래주의는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에 큰 영향을 미쳤고 문학, 시각미술, 공연예술, 건축 분야로 퍼져나간 중요한 예술운동이었지만 전쟁을 신봉하고 파시즘과 결탁한 죗값을 치르느라 꽤 오랜 시간을 암흑 속에 묻혀있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2009년 2월, 밀라노 두오모 성당 앞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갈레리아에서 미래주의 발생 100주년 기념으로 보초니 그림 ‘갈레리아의 소동’을 재현하는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무용가 33명이 색색의 트레이닝복을 입고 펄쩍거리며 무리지어서 뛰어다녔고 어딘가에 숨겨진 스피커에서 귀가 찢어질 듯한 음악도 들렸다. 체구가 작은 사람을 서너 명이 모여 들어다 던지는 시늉을 하거나 도망가려는 사람을 억지로 붙잡아 벌주는 흉내를 내기도 해서 실제 싸움인 줄 알고 놀라는 관광객도 있었다. 결국엔 소음이 지나치다는 시민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는 바람에 현장에 나와 있던 문화국장 마시밀리아노 플로리는 경찰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경찰은 문화국장과 안무가에게 벌금을 추징하기 위해 신분증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고, 화가 치민 문화국장은 밀라노시는 예술과 예술가들에게 자유를 보장한다고 고함을 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식의 예술에 적대적인 눈 가린 행정이 계속되는 한 이 나라를 바꾸긴 힘들 겁니다. 경찰은 우리가 기계인 것처럼 판단하지만 우리가 사람이란 걸 잊은 것 같네요. 게다가 시에 소속된 그들이 우리에게 허가를 운운하다니 이건 정말 말이 안 돼요”라며 불쾌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갈레리아의 소동’, 움베르토 보초니. 1910년 작.

올해 54번째로 열리게 될 베니스 비엔날레의 이탈리아관은 비토리오 스가르비가 커미셔너로 선정되었다. 고전예술 전문인 그가 현대미술 작품으로 채워져야 할 비엔날레를 맡은 것은 의외라는 분위기다. 스가르비 자신도 생각지도 않았던 제안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사실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인, 문화권 인사들과 언쟁을 벌여 논란을 몰고 다니는 미술비평가이며 정치인이기도 하다. 그는 비엔날레 전시 계획을 묻는 인터뷰에서 만테냐의 ‘죽은 예수’를 전시장 한가운데에 가져다 놓겠다고 해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의 정치나 문화 관련 행보를 살펴볼 때 그는 선동적이고 도발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는 것을 즐기는 듯하다.

“올해 이탈리아관은 어느 해보다 더 심하게 비난을 받는 것 같네요. 어느 해보다 더 관람객이 많았는데 말이죠. 그럼 관객을 많이 모으기 위해서 흉측한 전시를 꾸미길 바라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전 멋진 전시를 만들어 볼까 해요. 아무도 보러오지 않게 말이죠.” 2년 전 이탈리아 관 커미셔너였던 루카 베아트리체에게 혹평이 쏟아졌을 때 스가르비가 비난하는 쪽을 비꼬며 한 말이다.

그리고 스가르비가 올해의 커미셔너로 선정되었을 때에는 루카 베아트리체가 엄호 사격을 해주었다.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겠어요. 비토리오 덕분에 지금까지 소비에트 연방체제 스타일로 아르테 포베라를 이탈리아의 유일한 예술인 것처럼 꾸미던 패거리에 휩쓸리지 않는 두 번째 비엔날레가 탄생하겠네요.”

예술은 세상을 진실하고 선명하게 투영하는 거울이다. 일부의 권력 싸움이 다가오는 6월부터 시작될 비엔날레 전시에까지 영향을 주지 않기를 바란다.

밀라노=조각·미술설치가 hojin00@gmail.com 

입력 2011.02.08 (화)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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