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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시각

삼키고 싶거나 핥고 싶거나

[매거진 esc]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극
효과를 ‘시크’하게 포장한 알약과 과장된 ‘메롱’ 포즈의 추파춥스 
 

» 알약 
 
오늘 아침 내가 삼킨 두통약은 동그란 분홍색 알약이었다. 약을 먹어 내 상태가 변할 거라 믿으면서도 나는 약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설명서도 읽지 않았고 어떤 성분이 캡슐 안에 뭉쳐 있는지 모른다. 내게 알약은 구원이나 치료제가 아니라 밋밋한 디자인의 무표정한 사물에 가깝다.

이 무표정한 알약은 말간 얼굴을 하고 하얀 거짓말을 한다. 우리가 사물인 약에게 ‘아프다 아프다’ 호소하지 않는 것처럼 알약 또한 단호하고 절제된 닌자 같은 얼굴로 약국 안에 있다. 알약은 셀 수 없이 많은 질병을 치료하는 선하고 깨끗한 이미지의 표상이다. 하지만 무엇이 쓰고 무엇이 독한 요소인지 속살을 보여주진 않는다. 여러 약제들은 흰색, 연두색, 연보라색처럼 하나의 색상 가면을 쓴 채 모습을 드러낸다. 칼이나 총 같은 무기는 자신이 얼마나 날렵하고 독한 놈인지 티를 내지만 알약은 속 없는 민얼굴을 하고 있다. 아픔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오히려 무심하다 못해 어딘가 비인간적인 차가움이 풍긴다. 한약에서 풍기는 짙은 냄새는 모두 증발되고 최대한의 효과를 내기 위한 압축적인 형태만 남아 있는 거다. 
    
» 추파춥스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무시무시함과는 별개로 알약은 색깔이나 캡슐 크기, 용기 등에서 점점 밝고 가벼운 이미지를 구사한다. 비아그라는 남성다움을 상징하는 건강한 푸른색으로, 감기약은 일반적인 선호색인 초록색을 택한다. 항우울제는 진정효과가 있는 파스텔톤을 취하고, 빨간색 알약은 신속하고 강렬한 약효 이미지를 입는다. 알약이 이렇게 ‘시크’하다면 사탕은 속절없이 혀를 내밀고 까부는 ‘메롱’ 포즈의 디자인이다. 사탕은 어른의 사회가 용인한 철부지 기호품으로서 자기 몸을 발가벗고 보여준다. 달콤한 맛을 100% 달게 보이도록 화장한 얼굴이다.

사탕은 권위 없는 물건이자 조무래기가 먹는 설탕 덩어리쯤으로 폄하된다. 그래도 사탕 포장지는 맛의 환각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걸 멈추지 않는다. 슈퍼마켓 계산대 바로 옆에 놓인 ‘추파춥스’가 대표적이다. 사탕의 맛을 이렇게 싱크로율 100%로 직설적으로 표현한 디자인이 있을까? 주황색과 노란색이 혼합된 포장지를 열면 오렌지맛과 바나나맛이, 보라색과 살구색의 포장지를 벗기면 포도맛과 요구르트맛이 튀어나온다.

1958년 탄생한 ‘추파춥스’는 스페인 사업가 베르나트가 친구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디자인을 부탁하면서 광기 어린 이미지를 사탕에 덧입히게 됐다. ‘핥다’는 뜻의 에스파냐어 ‘추파르’(chupar)처럼 그냥 핥는 막대사탕이었던 추파춥스는 괴짜 예술가가 꿈에서 보던 빙빙 돌아가는 초현실적 제스처를 로고로 삼으며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달리의 기괴한 작품들과 그가 품었던 신체절단의 두려움을 상기시켜 볼 때, 추파춥스의 포장지는 어딘가 병적인 어른들을 위로해주는 달달한 약처럼 보인다. 알약과 사탕의 작고 예쁜 얼굴은 닮았지만 너무도 다른 방법으로 결핍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달랜다. 약과 사탕을 번갈아 먹는 모습은 희극과 비극이 적당히 섞인 가장 인간적인 모습이려나. 알약과 사탕 사이쯤에 나의 오늘도 있는 것 같다.

현시원 객원기자 sonvadak25@hanmail.net

기사등록 : 2010-03-10 오후 07:09:32  기사수정 : 2010-03-13 오후 04:4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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