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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네이버 한국의 생활디자인} 120분 간의 대화


첫 번째 대화의 주제는 ‘네이버 한국의 생활디자인’이다.  ‘네이버 한국의 생활디자인’은 2008년 한국디자인문화재단 (현 (재)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에서 선정한  ‘코리아디자인 2008’로부터 시작되었다. 약 4개월에 걸쳐 진행된 이 작업은 그해 12월 『코리아디자인 2008』목록집을 내어 마무리되었고, 이듬해 네이버에서 한국의 생활디자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한국디자인사의 아카이브로써, 디자인을 대중의 생활 속에서 조망한 ‘코리아디자인 2008’은 지금까지 우리가 다뤘던 디자인의 대상과 영역 밖에 있던 것을 포함시켰다.
< 정글콜론> 은 디자인의 대상과 영역을 다르게 본 ‘코리아디자인 2008’과 ‘네이버 한국의 생활디자인’을 놓고 수없이 논의했던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을 다시 고민했다. 다음은 120분간의 기록이다.

패널 
강현주 
인하대학교 시각정보디자인전공 교수
박해천  홍익대학교 BK 연구교수
오창섭  건국대 디자인학부 교수
진행 이용제 | 에디터 정윤희 | 사진 스튜디오 salt | 디자인 강혜정


이용제  이번 대담은 ‘네이버 한국의 생활디자인’의 근간이 되는 ‘코리아디자인 2008’ 선정위원 및 큐레이터로 참여하셨던 강현주 교수님, 박해천 교수님, 그리고 오창섭 교수님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합니다. 우선 코리아디자인 선정 당시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오창섭  코리아디자인 자산을 선정하던 해에 한국디자인문화재단 주최로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한국의 시각문화와 디자인 40년’이라는 전시(2008.9.26~11.9)가 있었습니다.
이 전시는 지난 40년간 한국의 시각 생산문화와 수용문화를 동시에 다루었는데요. 시각 생산문화가 디자인계 내부의 이야기였다고 한다면 시각 수용문화는 일상 삶의 주체들이 어떠한 시각문화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 왔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코리아디자인 2008’은 후자의 내용, 즉 시각 수용문화와 맥을 같이 하는 방향으로 기획되고 전개되었습니다. 그것이 출발한지 얼마 안 되는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데도 도움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강현주  원래는 코리아디자인 52선이 아니라 100선을 만들려고 했었지요. 네 분의 큐레이터에게 각각 50점씩 선정해 주십사 부탁 드렸고, 선정위원이 200점 가운데 100점을 추려 내기로 했었어요. 결과적으로는 중복된 것들이 많았고 또 기준을 세워서 정하다 보니 52점을 선정하게 된 거죠. 선정된 디자인을 바탕으로 자료집을 내고 전시도 진행했었어요. ‘한국의 생활디자인’은 네이버가 개편하던 시기에 이 자료들을 활용하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진행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고 처음에는 선정된 52점 중에 절반 정도만 소개하는 것으로 계획되었죠. 반응이 좋아서 최근까지도 계속 되고 있고, 52선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이나 당시 선정위원이나 큐레이터로 참여하지 않았던 분들의 참여도 이어지고 있어요. 그런 걸 보면 디자인이 확장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좋지요.


이용제  코리아디자인 52선의 선정 기준은 어떤 것들이었나요.

강현주  당시 선정위원들이 모여서 기준을 만들자고 논의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한 분이 오창섭 교수님이세요. 사실 의견 충돌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좁은 의미의 전문적 디자인에 한정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확장하고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해 이견이 있었거든요.

오창섭  디자인은 물질적인 모습으로 구체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구체적 산물들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과 삶에 영향을 끼치면서 존재하거든요. 이렇게 보았을 때, 그리 오래되지 않은 근대의 공간에서 한국인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었거나 여전히 강한 기억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들이 선정되길 원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선정 대상이나 기준 역시 디자인계에서 디자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물질문화 일반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강현주  선정기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김명환 교수님(계원조형예술대학 전시디자인과, ‘코리아디자인 2008’ 선정위원)이 명쾌하게 말씀하시더라고요. 5,60년대 이후를 대상 시기로 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이건 한국의 디자인이야’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그것을 디자인이라 부르던, 그렇지 않던 간에 그 대상이 한국인들의 생활 경험과 연결되면 되지 않느냐는 거였어요. 디자인 향유자 또는 소비자 측면에서 기준을 잡으면 어떻겠느냐는 거죠. 그랬더니 생각보다 명쾌하게 정리가 되더라고요.

박해천  큐레이터로 참여했다보니, 저는 선정위원님들과는 약간 다른 위치에서 다른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요. 일단 ‘디자인’으로 소환될 수 있는 개념의 입체적인 공간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거기에는 갖가지 층위나 이질적인 차원들이 존재할 것입니다. 선정위원님들이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고 한다면, 그 기준의 초석이 된 디자인의 정의가 그 개념 공간 안에서 어디에 어떻게 놓여 있는지 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큐레이터와 선정위원 사이에서 나름의 피드백 과정을 거치면서 논의될 필요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네이버에 연재되는 ‘매일의 디자인’을 보면,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로운 댓글들이 있습니다. 특히 버내큘러 디자인에 속하는 대상을 다루는 글들의 댓글을 보면, “너희는 아무것이나 다 디자인이라고 하느냐”고 묻고 있거든요. 저는 이런 반응이 디자인을 선정하는 기준의 불명확함, 디자인의 정의가 지닌 모호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오창섭  처음부터 완벽한 그림을 가지고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당시를 돌이켜보면, 큐레이터의 의견을 토대로 선정위원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의견충돌도 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관점이 다른 4명의 큐레이터가 추천한 대상들의 내용과 범위의 편차가 조금은 있어서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에 대한 나름의 생산적인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책자 말미에 추천대상을 큐레이터별로 담아냈던 것도
그 차이를 드러내고 오해를 가급적 줄이고자 함이었습니다.

강현주  결과적으로 보면 사실은 같은 콘텐츠라고 봐요. 처음부터 디자인을 거르고 걸러 선정했다면 현재와 같이 다양한 층위가 생길 수 있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이번에 선정된 디자인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첨삭된 것들이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해요. 디자인 개념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게 아니냐는 논의는 다시 해봐야겠지만 디자인의 저변확대에 있어서도 일정 부분 기여했다고 생각하고요.

오창섭  ‘코리아디자인 2008’은 결과적으로 디자인계, 혹은 디자이너들에게 일상의 삶, 혹은 일상의 시각문화에 자신들이 얼마만큼의 영향을 주었고, 혹은 주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또한 일반인들의 디자인에 대한 이해, 혹은 디자인에 대한 친밀도를 확대시켰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이란 것이 저 멀리에 자리하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서 접할 수 있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인식을 만들어 주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박해천  하지만 저는 이런 접근이 중요한 공백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일상문화 속의 ‘한국’ 디자인으로 선정된 것 중 상당수가 일본의 현대 문화의 영향권 아래 있는 것이잖아요. 일상 문화의 상당수가 식민지 시기의 잔재이기도 하고, 해방 후 일본이나 서구의 다양한 문물을 모방하고 번역한 결과물도 있고요. 저는 이런 부분들에 대한 설명의 부재가 일종의 공백처럼 다가오는 것 같아요.

오창섭  일본에서 왔다, 유럽에서 왔다, 경로를 밝히는 것은 나름 의미가 있는 작업이지만 일상 주체의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그것의 유래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맥락에서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포니 자동차를 어떻게 할 것인가도 논의 됐는데, 선정 기준이 수용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보자는 것이기 때문에 포함시키게 됐어요. 중요한 것은 한국이라는 지리적 환경 내에서 이루어졌던 경험주체의 경험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정된 내용이 바로 ‘한국의 디자인이다’라거나 ‘한국의 디자인을 대표해야 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내용은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이 기획은 특정한 관점에서 본 우리 디자인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용제  논의가 ‘디자인’에서 ‘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저는 순수하게 한국에서 자연 발화된 것만을 한국의 것이라고 하기보다, 수입되었을지라도 우리의 삶에 생산자로서든 수용자로서든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고 재생산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판단의 단서라고 봅니다. 이 자리가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을 논의하는 자리이기도 하니, 한국 또는 정체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오창섭  저는 개인적으로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정체성 논의는 늘 정체성 그 자체가 아닌 다른 특정한 목적을 위해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특정 주체의 이득과 관계가 되고, 그것은 늘 정체성 논의에서는 은폐된 채로 작동합니다. 한국의 디자인이 뭐냐, 디자인의 정체성이 뭐냐고들 하는데, 여기에도 저는 그러한 의도가 자리하고 있다고 봐요.

박해천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정체성의 문제는, 제3세계 혹은 반주변부 국가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거나 디자인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딜레마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 본지페(Gui Bonsiepe)의 < 인터페이스> 를 번역하면서 읽은 내용인데, 일정한 산업화 단계에 진입한 제3세계 국가의 디자이너 상당수가 거의 예외 없이 전통이나 정체성의 문제를 들고 나온다고 지적하더군요. 한편으로는 선진국의 디자인문화에 대한 콤플렉스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시대의 지정학적 조건 속에 태어나 디자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강박 같은 것이기도 한 거죠. 선진국의 디자인과 미적으로 차별화된 부분을 보여주지 않으면, 모방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는 강박 말이지요. 그런데 요즘 젊은 디자이너들을 보면 그런 콤플렉스나 강박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아요. 굳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디자이너로서 지금 행하는 것이 바로 디자인이라는 인식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강현주  선정과정 중에 포니 자동차나 모나미 볼펜의 경우, 선정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길게 이야기했어요. 결국 포함시킨 것은 한국인의 생활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너무 버내큘러적이거나 공예적인 것들은 안 되겠지만 대량생산된 것으로 하되, 경험적인 측면에서 한국인의 경험을 구성하는데 영향을 미쳤던 것들을 선정한 거죠.

박해천  그런데 그런 선정 과정에서 누구의 경험인지 세대와 출처를 명확히 밝혀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60년대생, 70년대생, 80년대 생이 경험한 시각문화가 다 다를 테니까요. 개별 세대의 감수성이나 취향이 얼마만큼 이질적인지 좀 더 정교하게 검토해봐야 할 필요가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다양한 사회경제적인 구조변동을 경험했던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 대해선 어느 정도 밝혀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창섭  경험이라고 했을 때, 누구의 경험인가라는 주체의 문제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한국인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 논의를 어렵게 합니다. 선정이라는 행위는 선정 주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고, 선정 주체가 일정한 경험을 가진 인간인 이상 아무리 객관적인 기준과 틀을 토대로 선정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의 경험과 이해방식이 선정에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코리아디자인 2008’은 미완의 기획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오히려 향후 다른 주체가 다른 기준으로 한국의 디자인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큰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용제  지금 말씀은 선정기준에 대한 문제제기라기보다 과정에 대한 문제제기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코리아디자인은 큐레이터가 추천한 것 중에 52점을 간추린 건데, 과정에서 선정하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디자인으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민한 경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오창섭  그런 것은 없었지만, 내용이 균질하지 못한 것으로 인해 위원들 간의 가벼운 충돌은 있었다고 봅니다. 디자인계의 맥락에서는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일상 주체의 경험에서 봤을 때는 포함시키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강현주  디자인에 대한 진입장벽을 어떤 높낮이로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라고나 할까요. 우리 입장에서는 디자인의 대중화일텐데, 사실 그런 의식 없이 그냥 얘기해도 되는 부분이 있는 거죠.

박해천  디자인에 대한 논의의 폭을 넓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산업화시기에 디자인계 내부의 생산물들, 그러니까 전문 디자이너의 작업 결과물 중에서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수성을 반영하거나 적극적으로 상황 논리에 개입한 사례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연구자들의 시선이 일상생활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그런데 일상성은 디자인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연구, 사회학, 역사학, 건축사, 도시사 등 다양한 전문 분야들도 눈독을 들이는 관심 분야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각각의 전문성으로 일상성의 역사적 공간을 점유하려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지요. 분명 대중매체의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의 디자인은 흥미로운 기삿거리로 간주되겠지만, 일상성에 대한 디자인 연구가 제기하고자 하는 전문적인 의제나 차별화된 문제 설정 같은 것들이 명확히 논의되지 않는다면, 그저 대중의 노스탤지어에 영합하는 프로젝트에서 벗어나기 힘들지 않을까요? 그런 일들이 되풀이되면 될수록, 대중들은 ‘디자인’을 별다른 의미값을 지니지 않은 사회적 실천으로 인식하겠지요.

오창섭  일상의 경험을 토대로 한다고 했지만, 선정위원이 4명이니 4개의 관점이 존재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4개의 서로 다른 관점이 동시에 작동하다보니 아무래도 완벽히 자기완결적인 그림은 그려질 수 없었겠죠.

이용제  저는 디자인은 무엇이다, 라고 하는 설명이 지금보다 확대된 부분까지 포괄해서 다시 섬세하게 정의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오창섭  요즘은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여기저기에서 그럴듯한 아우라를 풍기며 사용되고 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표현이 홍수인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사용 상황마다 디자인의 의미는 다릅니다. 디자이너들 사이에도 그 의미를 공유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두들 디자인을 이야기하지만 다른 것을 상상하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도 소통이 되고 있는 것처럼 디자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배제하고 디자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보다 명확히 의미를 소통시킬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최근 해봅니다.

박해천  ‘이것도 디자인이고, 저것도 디자인이고, 모든 게 디자인이니까, 디자인은 중요하다’라는 식의 논리가 전형적인 사례일 텐데, 사실 이런 논리는 디자인이라는 개념 차제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물론 이런 논리가 디자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 폭을 넓히기 위한 슬로건으로,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논리가 되풀이되면서 부작용들이 발생하지요. 특정 단체나 개인이 자신의 ‘정치적’ 혹은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자의적으로 가져다 쓸 수 있는 상황이 등장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디자인계 혹은 사회가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에 대한 정의가 무엇인지, 이런 문제보다는 개별 디자이너들이 취약한 조건들 속에서 무엇을 행하고 있고 어떤 결과물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누구와 소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나름대로 지속 가능한 물질적 경로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창섭  개념으로써의 디자인이 아닌 디자이너를 주목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접근이라고 봅니다. 디자이너에게 주목한다는 것은 디자이너들의 문제의식과 작업논리를 주목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한 주목은 디자이너들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의식이나 작업논리를 탄탄히 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여전히 디자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토대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인 받으려는 디자이너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불안을 느낄 것입니다. 최근 정체성에 대한 논의가 10수년 전에 비해 줄어든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긍정적인 징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용제  과거, 차이점이 있는 우리 디자인을 보여줘야 한다는 노력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담은 디자인이 우후죽순 생겨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인위적 행위가 아닌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는 것일까요.

오창섭  정체성은 다른 것의 존재, 그리고 그것들과 구별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비교와 반응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이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국민국가들이 형성되는 과정과 매우 유사합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이미 국민국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들의 동맹 형태였던 다른 나라들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쟁은 이후 국민국가의 확대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살 길이었기 때문이었죠. 국민국가는 교통과 통신, 매체 등을 통해 이질적인 타자들을 상상의 공동체로 만들어 냅니다. 거대한 하나를 만들어 내는 것이지요.
그 거대한 하나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마치 정체성이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통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과 같습니다.

박해천  이를테면 < 정글콜론> 도 잡지로서 기획을 하려면 디자인의 정체성에 대한 공유된 합의가 있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IMF외환위기 이후, 그런 합의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이천년대 전반에 걸쳐 급변했던 경제적 변화에 따라 디자인을 둘러싼 사회적 생태계가 이전과는 완연히 달라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에 따라 디자인에 대한 개념 정의 자체도 변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요. 그래서 결국 ‘바로 지금 여기에 디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현재 활동 중인 디자이너들의 활동 양태와 결과를 통해 새롭게 제시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디자인의 ‘특정한’ 정체성에 대한 공감이나 공유보다는,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즉 그것을 우리가 성취해야 하는 고정된 어떤 ‘목표’로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새롭게  ‘발명’해야 하는 가변적인 그 무엇으로 바라보는 것이지요.

이용제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가 무엇을 하느냐, 그리고 무엇을 만들어 내고 있느냐 같습니다. 또한 근대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디자인이라는 말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고 지금도 그때 정의가 유효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코리아디자인 52선은 과거에 정의된 디자인으로 설명하기 어려워 보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디자인의 정의를 시대에 맞게 진화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박해천  물론 디자인 제도 내부의 주요 흐름은 여전히 산업화 시기의 관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변화에 대한 반응의 온도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지요. 다만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산업 구조나 경제가 선진국들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예측하기 힘든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이런 상황이, 주류가 내세우는 정상적인 정체성과는 거리를 둔 변종 디자이너들이 출현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비록 소수일지라도 그런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도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하구요. 그것이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촉매제라고 생각합니다.

오창섭  저는 최근의 양상,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란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초반에 이야기했던 정체성, 그러니까 디자인에 대해 합의된 것들을 토대로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징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지금 나타나는 모습은 디자이너들의 작업논리라든가 문제의식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긍정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디자인의 본질이 되는 것을 찾아 나서는 움직임보다는 새로운 생성적 탈주의 움직임을 긍정하고 그것을 촉발시킬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이죠.

이용제  저는 코리아디자인 52선을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디자인에 대한 생각을 혼란스럽게 만들어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무모한 일이지만 오늘의 이야기가 앞으로 있을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의 논의에 작더라도 한 부분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대화, 그 후

이번 좌담은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을 생활디자인을 통해서 정의해보는 시도였다. 지금까지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을 논의할 때 보통 역사적 맥락과 거장들의 디자인 결과물을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늘 부딪치는 것은 ‘한국’과 ‘디자인’이라는 말의 범위가 문제였다. 이 좌담에서 한국 디자인의 정체성 전체를 논의하고 답을 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디자인의 영역과 대상이 확장되고 있고 또한 디자인의 정의가 달라져야 할 필요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직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할지라도 점차 디자인의 중심 가치와 범위가 이동과 함께 확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