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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시각

타이포 아트(TYPOART)

[문화] ‘타이포 아트(TYPOART)’
글자 예술이 되다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Hope(Hope overcomes everything·희망이 이긴다)’ ‘Love(Take your love·그대를 잡아요)’ ‘Move(You can move the world·세상을 움직여봐)’….

‘타이포 아티스트’ 탁소(TAKSO·37)씨가 그린 타이포 작품엔 ‘위트’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짜리몽땅한 손발에 두꺼운 알파벳 몸통을 짊어진, 사람 모양을 한 이 타이포들은 노란색·빨간색의 화려한 원색 옷을 입고 웃고, 울고, 화내고 있었다.

‘타이포 아트’는 ‘타이포(글자)’를 이용해 펼치는 새로운 아트 장르다. 그간 타이포의 글꼴과 위치·간격 등을 이용해 글자를 배치하고 디자인하는 ‘타이포 그래픽’은 있었지만, 글자 자체가 표정을 가진 ‘시각적 메시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타이포 아트’의 타이포는 보는 순간 누구라도 쉽게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간단하고 정형화돼 있다. 팝아트와 광고 등에서 타이포를 이용해 재기 넘치는 변형미를 선보이는 것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또 타이포가 사용된 맥락이 아닌, 타이포 그 자체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한마디로 ‘글자로 전달하는 미술, 글자로 전하는 감성 메시지’다.

“더 늦기 전에 진짜 창작 해보자” 회사에 사표

‘타이포 아트’란 장르를 개척한 장본인은 ‘타이포 아티스트’ 탁소씨다. 그는 지난 10년간 광고계에 몸담았던 ‘광고쟁이’였다. ‘김홍종’이란 본명으로 살던 37년 동안, 그는 금속공예과 출신으론 보기 드문 광고 기획자로 이름을 날렸다. 1996년 조선일보 광고대상에서 대학생으론 이례적으로 신인부문 대상을 거머쥔 게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 Angel & Devil

금강기획을 거쳐 두산그룹 오리콤 아트디렉터(차장)를 지내며 그는 두산 소주 ‘처음처럼’의 ‘흔들어라’와 KB카드 ‘가슴에서 꺼내라’ 등 유명한 캘리그라피(손글씨)를 직접 썼다. 이 밖에 그가 만들고 기획한 광고는 LG텔레콤, 버거킹, 두산위브, 에뛰드 등 셀 수 없이 많다. 누가 봐도 전도 유망했던 그가 지난 3월 회사에 사표를 냈을 때 주변인들의 반응은 “도대체 왜 이러냐”는 것이었다.

“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돈보다는 시간이 더 중요한 거니까요. 짧은 인생, 더 늦기 전에 진짜 제가 하고 싶은 일, 진짜 ‘창작’을 해봐야 하잖아요. 제게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면 회사를 그만두기까진 못했겠죠. 그렇지만 아직 전 혼자고, 지금 아니면 아마 평생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런데, 안동에 계신 부모님들은 제가 회사 그만둔 걸 아직 모르세요. 아시면 정말 많이 놀라실 텐데….” 탁소씨가 멋쩍게 웃었다.
 
▲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앤디 워홀의 팝아트보다 유쾌하게

그가 ‘타이포 아트’의 세계에 빠진 이유는 단순했다. ‘쉽게, 재미있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어 타이포만큼 명료하고 정확한 매개체가 없기 때문이다. 광고를 기획하면서 광고 카피와 캘리그라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에게 ‘타이포’는 앤디 워홀의 팝아트보다 더 유쾌하고 키스 헤링(미국 팝아티스트)의 그래피티보다 더 선명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희망, 사랑, 꿈….이걸 그림으로 그린다면 백이면 백, 보는 사람마다 다 해석이 달라질 겁니다. 하지만 타이포가 중심이 되면 메시지는 보다 선명하고 쉬워져요. 아무리 유머감각과 위트를 담았다 해도 결국 중요한 건 메시지거든요.” 그의 ‘타이포 아트’는 심각하거나 어려운 메시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했다. 애초부터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재미있어지는 예술’을 하는 게 그의 꿈이기 때문이다.  
 
▶ Plan

탁소의 ‘타이포 아트’는 지난해 9월 서울 청담동의 한 갤러리에서 첫선을 보였다. 2주일간 총 13점의 작품을 선보인 이 전시회의 주제는 ‘타이포에 위트가 생겼다’. HOPE(희망), LOVE(사랑), DREAM(꿈), HEART(마음), SMILE(미소) 등 그가 선택한 13개의 단어에 캐릭터와 옷, 표정을 입혔다. 전시회 첫날, 무려 300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글자도 아트가 될 수 있는지 몰랐다’ ‘상품으로 만들어도 되겠다’ ‘그냥 전시만 하기 아깝다’는 칭찬과 격려가 쏟아졌다. 

그는 “이때 타이포 아트를 무한정 확장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지난 봄 그는 지난 10년간 열정을 쏟았던 광고계를 떠나 본격적인 ‘타이포 아트’ 작업에 착수했다. 고향인 경북 안동에 작업실을 마련해 놓고 그 안에 틀혀박혀 실크스크린 작업에 몰두했다. 작년엔 작품 13점 모두를 실크스크린으로 처리했지만 올해부턴 실크스크린을 바탕으로 디지털 작업을 통해 색을 입히고 있다.


사진·동영상으로 영역 확대

본격적으로 ‘타이포 아트’에 발을 내딛자,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고 했다. 최근 ‘타이포 아트’ 작업 대상을 100개 단어로 확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단어를 고르는 기준도 명확했다. ‘전세계인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언어’, 즉 전세계 어느 누가 봐도 쉽게 공감할 수 있고 미소 지을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단어가 중심이 됐다. ‘Yes(긍정의 힘)’ ‘Try(시도하고 또 시도하고)’ ‘Mistake(실수해도 괜찮아)’ ‘Failure(실패를 두려워 마)’ 등 수많은 단어가 그렇게 새로 선택됐다. 

▲ Love - 그대를 잡아요

현재 그의 ‘타이포 아트’는 그림을 넘어 사진과 동영상으로 영역을 계속 넓혀나가는 중이다. 탁소씨는 이를 ‘타이포 포토’와 ‘타이포 플래시’라 이름 붙였다. 그가 국회의사당, 폐차장 등 서울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직접 찍은 ‘타이포 포토’엔 ‘Recycle(당신도 나도 지금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 ‘Walk(지금, 차보다 당신이 더 빠르다)’ 등 시사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고, ‘타이포 플래시’엔 ‘Lucky’란 알파벳이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모습과 ‘Try’란 알파벳 캐릭터가 하늘에 손을 뻗는 장면 등 그가 하고픈 말이 담겼다.  

▲ Hope - 정치에도 희망이 생기길 

▲ Time - 시간은 총알보다 빠르다

글자는 읽는 것이라는 편견은 버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떨까. 질문을 던지자마자 일본 전시회, 조형물 제작, 아트북 출판, 모바일 캐릭터 개발, 장난감 상품화, 비행기 래핑(비행기 본체에 그려진 그림) 등 관련된 응용 계획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자동 반사에 가까운 ‘아이디어 확장’이었다. 그가 ‘타이포 아트’에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아붓고 있는지, 그가 그동안 얼마나 뼛속까지 깊이 ‘창조맨’으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 Recycle - 당신도 나도 지금 쓰레기를 만들고 있다

“앤디 워홀, 키스 헤링의 작품도 처음엔 장난처럼, 만화처럼 받아들여졌죠. 하지만 그 시도가 도전적인 메시지를 가득 담고 있다는 걸 아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그들의 작품이 티셔츠로, 엽서로, 지하철 광고로 상품화돼도 평가절하하지 않는 이유죠. ‘상품화’와 ‘아트’는 이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어요. ‘상품화’라는 것도 결국 한 작품의 메시지가 구현되는 과정의 일부이고, 그 메시지를 특정 계층뿐 아니라 일반 대중 모두에게 널리 알리는 수단이니까요.” 

▲ Dream - 꿈을 가두지 말아요

그는 올해 자신이 만든 타이포 알파벳 26개(A~Z)를 모두 한국저작권협회에 저작권 등록했다. 둥글고 각지게 의인화된 자신의 창작 타이포들을 누군가 오직 상업적인 의도에서만 베끼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트는 어려운 게 아니에요. 전 그걸 말하고 싶었어요. 심각한 것도 심각하지 않게, 뻔한 것도 뻔하지 않게, 어려운 것도 어렵지 않게 접근하고 싶어요. ‘그림은 보는 것’이고, ‘글자는 읽는 것’이라는 경계도 해체하고 싶었어요. 글자도 그림처럼 그냥 딱 보는 순간 이해되고 가슴에 와 닿을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건 정말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지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재미있게 놀면서 즐기면서 ‘타이포 아트’를 할 겁니다.”


/ 박세미 기자 runa@chosun.com

출처 : 주간조선
http://weekly.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2/22/2009122200936_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