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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시각

[정경원의 디자인 노트] [6] 지나친 '지역 친화적 디자인'의 실패

정경원 카이스트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승객이 여행하는 지역의 특성을 항공기에 표시하면 어떨까? 1997년 영국항공(BA)은 목적지의 문화와 전통이 반영된 디자인을 항공기에 그려 넣어 승객들의 만족도를 높이려는 전략을 추진했다. 민영화된 영국항공의 승객 중 외국인이 60%를 넘으므로 '영국다움'보다는 '지역성'을 부각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비행기 앞부분에는 영국항공의 공식 로고를 표시하되, 꼬리날개에는 목적지의 저명한 화가·공예가·서예가들이 만든 디자인을 사용하기로 했다. 아시아 노선을 운항하는 항공기에는 홍콩 서예가가 쓴 한자어 '中國'의 이미지, 스코틀랜드 노선에는 직조 공예가가 디자인한 타탄 체크무늬를 그려넣는 식이었다.

  'BA의 지역 친화적 디자인' - 폴란드의 코구티 로위키가 어린 수탉·공작새와 꽃을 주제로 만든 그래픽 디자인이 적용된 영국항공 여객기, 1997년.(위 사진) 아래 사진은 이 같은 디자인을 입힌 영국항공 비행기들이 도열한 모습.

로버트 아일링 당시 영국항공 사장은 예산 6000만파운드(약 1000억원)로 해마다 비행기 100대에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하여 5년 만에 교체를 마치기로 했다. 그런데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지저분하다' '혼란스럽다' 등 부정적인 여론이 일어났다. 비행기 한 대만 보면 개성이 돋보이지만, 여러 대가 함께 있을 땐 그래픽 이미지들이 뒤섞여서 시각적인 공해(公害)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또한 항로의 수요 변화에 따라 항공기의 수급을 조절하는 데도 어려움이 생겼다. 더욱이 공항 관제사들의 오인(誤認)으로 추돌 사고 위험이 있다는 지적까지 제기되었다.

게다가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까지 나서 "영국항공은 제3세계의 항공사 같다"고 비판하자 반대 여론이 끓어올랐다. 영국항공은 즉각 기존의 디자인 전략을 포기하고,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을 활용한 새로운 디자인을 모든 항공기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영국항공의 기업 이미지는 크게 실추했고, 주가까지 반 토막 나자 결국 아일링 사장이 책임지고 사퇴했다.

기사입력 : 2012.04.23 23:00 | 수정 : 2012.04.23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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