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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 <2> 개미의자

손담비 의자춤도 그 짝퉁을 썼다는!
김신의 맥락으로 읽는 디자인 <2> 개미의자

김신 | 제256호 | 20120204 입력 

도서관이나 강연장, 회사 구내식당, 카페 등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의자가 있다. ‘7체어’다. 덴마크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센(1902~71)의 작품이다. 등받이가 개미허리처럼 잘록하게 들어가 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개미의자’로 더 많이 알려졌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이 개미의자는 대부분 7체어의 짝퉁이다. 7체어는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모방된 의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뛰어난 조형성과 생산 용이성, 이동 편의성의 장점 덕분에 이 의자는 마트의 플라스틱 의자만큼이나 우리에게 익숙해졌다.

야콥센은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떤 기분이 들까. 자신의 디자인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것에 흡족해할까, 아니면 무단 디자인 도용에 눈살을 찌푸릴까. 사실 야콥센은 생전에 이미 7체어 디자인의 무단 복제를 톡톡히 경험했다. 그러나 합판과 개미 다리처럼 가는 강철관을 결합한 이 스타일은 야콥센이 처음 내놓은 것도 아니다. 물론 야콥센이 남의 의자를 모방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스타일 측면에서 그가 전후 미국 모던 디자인 가구 스타일을 이끌었던 찰스 & 레이 임스 부부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임스 부부는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좋은 것을 값싸게 제공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기존의 무겁고 비싼 나무 의자가 아닌, 상대적으로 값싼 합판을 재료로 한 의자를 디자인했다. 특히 1945년 발표한 ‘LCW(Lounge Chair Wood)’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성공을 바탕으로 임스 부부의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유기적인 가구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됐다. 이 전시가 유럽의 여러 디자인 잡지에 소개되면서 자연스럽게 합판 가구가 유럽으로 전파됐다. 바야흐로 합판 가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합판 가구는 전후 어떻게 미국과 유럽을 강타할 수 있었을까. 먼저 전후 재건 시기에 실용성을 따지게 된 점을 들 수 있다. 단순한 형태의 모던 가구는 20세기 전반기부터 나왔지만 여전히 대중에게는 무거운 나무로 제작된 가구가 널리 보급되고 있었다. 이런 가구와 비교해 합판 가구는 가벼워서 움직이기 쉬웠고, 값이 쌌고, 게다가 튼튼했다.
 
합판이라는 재질은 흐물흐물할 정도로 얇게 켠 나무를 여러 장 붙여 만든다. 따라서 딱딱한 나무보다 성형이 쉬워 디자이너가 형태를 더 자유롭게 주무를 수 있다. 특히 좌판을 엉덩이에 맞게 살짝 들어가게 하는 것 같은 미묘한 곡선을 표현하는 데 알맞다. 값싸 보이는 재질을 유기적인 형태로 디자인해 근사하게 포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합판 의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의자에 앉는 것을 더 편안하게 해주었다.

아르네 야콥센은 제약회사 노보(Novo)의 구내식당 의자 디자인을 의뢰받았을 때 이 합판을 이용하기로 한다. 구내식당 의자라면 편리하게 이동하고 쌓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합판이 제격이었다. 한 장의 합판을 구부리고 좌판 아래 얇은 강철관 다리 3개를 결합한 개미의자가 1952년 탄생했다. 이 의자 디자인을 더 발전시켜 1955년 드디어 ‘7체어’를 내놓았다.

가구 디자인 강국 덴마크는 당시 다루기 까다롭고 무거운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좌판과 등받이에 가죽이나 천을 씌운 의자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전통과 견줘 야콥센의 합판 의자들은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런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고 개미의자와 7체어는 모두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두 의자의 생산으로 국제적인 가구 회사가 된 프리츠 한센의 오리지널 제품만 수백만 개가 팔렸다. 전 세계 모방작들을 합친다면 그 수는 집계할 수 없을 정도다. 재미있는 건 이들 수많은 짝퉁 중 하나가 7체어의 명성과 판매를 더욱 높여주었다는 것이다.

1963년 영국 정계를 발칵 뒤집은 스캔들이 터졌다. 크리스틴 킬러라는 매력적인 모델이 영국의 현직 국방장관과 불륜 관계를 맺은 사건이다. 그녀가 런던 거주 소련 대사관 직원과도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연일 이 스캔들이 신문을 장식했다. 크리스틴 킬러라는 이름이 악명을 드높이고 있는 바로 그때, 루이스 몰리라는 사진가가 찍은 킬러의 누드 사진이 공개됐다. 킬러가 옷을 벗고 의자 등받이에 팔을 괴고 있는 사진이다. 그녀의 벗은 상반신을 가린 의자 등받이의 형태는 분명 7체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등받이 위쪽 가운데 부분에 구멍이 나 있다. 명백한 짝퉁이다.

가짜 7체어를 소품으로 썼지만 스캔들과 함께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이 사진은 아이로니컬하게 오리지널 7체어의 명성도 높여주었다. 사진가 루이스 몰리는 이 사진이 유명해지자 데이비드 프로스트와 같은 당시 유명인을 대상으로 같은 포즈의 인물사진을 몇 장 더 찍었다. 이런 유명세로 인해 옷을 벗고 7체어를 뒤로 돌려 특유의 잘록한 등받이 허리 부분으로 다리를 벌려 앉는 포즈가 하나의 아이콘처럼 됐다. 이 사진 역시 수많은 모방작을 낳았다. 몇 해 전 가수 손담비가 섹시한 의자춤을 선보였는데, 이 또한 크리스틴 킬러 사진의 수많은 아류 가운데 하나다. 용케도 소품으로 아무 의자나 쓰지 않고 7체어 짝퉁을 쓴 것을 보고 ‘나름대로 고증은 했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스캔들이 아니어도 7체어는 충분히 명성을 얻고 많이 팔렸을 것이다. 합판과 강철관이라는 단 2개의 재료, 그리고 단순한 구조와 형태로 이토록 개성이 뚜렷한 의자를 디자인한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실용성 또한 뛰어나다. 야콥센이 합판과 강철관이 결합된 모던 스타일의 의자를 처음 발표한 건 아니지만 7체어의 디자인은 그 전작들을 모두 뛰어넘는 걸작이다. 발표된 지 57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의 수많은 미술관과 도서관, 강당이 이 의자를 선택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수많은 가짜를 포함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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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씨는 홍익대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7년 동안 디자인 전문지 월간 ‘디자인’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