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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은 노동착취의 산물?

 

해외에서도 인기가 높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의 한 장면. 이 만화 한 장면의 뒷면엔 저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리는 아니메타의 고통이?
 
만화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은 일본의 대표적 문화상품입니다. 해외에서도 만화를 뜻하는 ‘망가(漫画)’나 애니메이션의 일본식 발음인 ‘아니메(アニメ)’가 일본 작품을 가리키는 말로 익숙하게 쓰일 정도입니다.

그런데 ‘만화왕국’ 일본에서 정작 이 업계 종사자들은 저임금과 중노동에 시달리며 혹사당한다는 분석이 제기돼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14일 동영상 사이트 니코니코를 통해 방영된 한 생방송 프로그램이 일본 아니메타(animator의 일본식 용어)의 현실을 폭로한 것인데요.

방송 내용에 따르면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이끌고 있는 아니메타는 40대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오타쿠가 열광하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10~20대 젊은이가 아니라 40대 아저씨들에 의해 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조금 의외입니다.

일본 뉴스에 방영된 일본 아니메타의 연령별 평균 연봉. 20대의 경우 110만엔에 불과하다.
 
그 이유는 바로 돈 때문이라는데요. 20대 아니메타의 평균 연봉이 겨우 110만엔(한화 약 1620만원)에 불과해 젊은층의 애니메이션 직종 기피 현상이 심각해졌다는 분석입니다. 일본에서 110만엔의 연봉만으론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열정만으로 많은 것을 포기한 채 이 업계에 뛰어든 젊은 오타쿠 꿈나무들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다른 직업을 찾는 경우도 많다는데요. 이 같은 현상이 심화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고령화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방송에선 한 유명 애니메이션 기업에서 일하는 회사원의 실제 연봉도 공개됐습니다. 공개된 액수는 423만엔(한화 약 6250만원)으로 적지 않았지만 그 회사원의 나이가 은퇴 시기가 다가오는 54세라는 점과 일본의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결코 여유롭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매달 10만엔밖에 벌지 못한다는 한 27세 아니메타.
 
사실 일본 아니메타의 고달픈 생활은 애니메이션에 관심이 높은 오타쿠들 사이에선 이미 알려진 얘기였는데요. 유튜브에는 아니메타의 평균 수입을 정리한 동영상도 게시돼 있습니다. 이 자료에도 20대는 110만엔, 30대가 213만엔, 40~60대가 400만엔대로 나옵니다.

한 아니메타가 “쉬지 않고 원화를 200장씩 그려봤자 한 달에 겨우 수만 엔 번다”며 “사회보장 혜택이나 퇴직금도 없다”고 토로한 내용도 소개돼 있습니다. 아니메타가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정도의 처우만 받으며 일하는 현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아니메타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었던 일이라 회사원으로 일하다 전직했는데 하루 12시간 일해도 월급은 이전의 절반”이라며 “밤샘 근무를 계속 해도 잔업 수당이 없고 의료보험 혜택조차 없다”고 밝혔습니다.

애니메이션 업계의 고령화가 작품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는 감독.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외에서 폭넓은 연령대의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현실과는 참 대조적입니다. 일본 네티즌들은 대형 제작사와 방송사가 아니메타를 착취해 수익 대부분을 가져가고 나눠주지 않은 탓이라며 분노를 나타냈는데요.

커피, 초콜릿이 선진국에선 고급 기호식품으로 사랑받지만 정작 원산지인 아프리카에선 아동 노동착취의 비참한 현실 속에 생산된다는 것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커피나 초콜릿 소비자가 잘 포장된 상품만 보듯이 일본 애니메이션 팬도 잘 제작된 작품만 보게 되는 것이죠.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지금처럼 젊은 아니메타가 계속 감소하고 고령화와 양극화가 심화된다면 특유의 창의력, 기획력도 쇠퇴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결국 애니메이션 산업 전체가 침체되는 위기에 봉착할 것입니다.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 ‘오! 나의 여신님’의 한 장면.
 
다른 일도 그렇겠지만 창작이 필요한 업종에선 특히 사람이 참 중요한 자산인데요. 많은 기업이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간과하며 사원을 기계 부속품 정도로만 여기는 것 같습니다. 비단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만 그런 것은 아니겠죠.

남원상 동아일보 전문기자 surreal@donga.com | 기사입력 2011-10-18 1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