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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시각

그래피티는 예술? 낙서?


지난 11일 도시철도 부산대역 아래 옹벽에서 그래피티 작가들이 공개적으로 작품을 그렸지만, 누군가에 의해 작품이 훼손되면서 12일 작가들 스스로 벽을 하얗게 칠해 버렸다. 

전날 작업했던 그래피티가 어디로 갔지?

지난 11일 오후 7시. 일명 '똥다리'로 불리는 도시철도 부산대역 아래 길이 80m 가까운 옹벽에서 16명의 그래피티 작가들이 420ml의 값싼 락카를 이용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가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글자 그래피티를 비롯해 월드컵 시즌에 맞춰 포효하는 박지성 선수를 형상화하거나, 천지창조의 이미지를 패러디한 그래피티도 보였다. '한디'라는 닉네임의 그래피티 작가의 작업은 이날 행사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냈다. 엎드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녀의 땅바닥이 갈라지면서 '헬프미'란 글자가 도드라진 그래피티는 안정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이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을 표출한 거였다.

도시철도 1호선 부산대역 그래피티 훼손
'페스티벌 아지트' 행사 결국 취소


부산시가 온천천을 정비하면서 도시철도 부산대역 앞을 비롯한 몇 곳만 남기고 다른 곳은 타일벽화 등을 붙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는 대안문화행동 재미난 복수, 그래피티 전시기획단 420ml가 주최한 '그래피티 페스티벌 아지트'. 온천천 벽면에 대한 창작행위 허용을 요구함과 동시에 온천천에서 생산가능한 문화콘텐츠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그곳 벽면의 그래피티가 가진 문화적 가치를 재확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부산은 물론 서울 강릉 순천 광주의 그래피티 작가 16명이 자발적으로 모여 함께 그림을 그렸다. 계획대로라면 12일에도 나머지 그래피티를 그리는 장면을 시민들에게 보여줌으로써, 그래피티의 가치를 시민들에게 알릴 작정이었다. 서명 운동도 진행할 작정이었다.

이날 행사장을 찾은 이태호 경희대 미대 교수는 "전국 어디서도 그렇게 넓고 시원하게 탁 틔어서 그래피티의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면서 "범죄에 가까웠던 80년대 미국의 그래피티와 달리 우리나라에선 그래피티가 하나의 예술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2000년 초부터 지우고 그리기를 계속하면서 국내는 물론 외국 작가들에게도 개성있는 그래피티의 성지가 된 온천천의 의미를 강조하기도 했다.

한데, 행사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11일 밤 누군가에 의해 아직 미완성된 그래피티 위에 온갖 낙서가 휘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12일 아침부터 작업을 준비하던 작가들은 황당함과 허탈함에 빠졌다.

비록 그래피티의 속성이 소유라기보다는 그리고 덧씌우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긴 하지만, 미완성된 그림에 의도적으로 낙서를 한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작가들 스스로 수습하기 힘들 정도로 지저분해진 벽을 하얗게 칠할 수밖에 없었다.

행사를 진행한 그래피티 작가 구헌주는 "1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부딪히는 과정을 거쳐 다른 곳에 없는 독특한 문화가 생긴 공간"이라면서 "이 공간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그래피티를 그리게 해 달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글·사진=이상헌 기자 ttong@busan.com 
부산일보 | 18면 | 입력시간: 2010-06-15 [09:3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