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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산업

´패밀리룩´으로 완성된 정의선 디자인 경영

기아차 사장시절 ´디자인 경영´ 현대·기아차 성공 일등공신

#1. 내년 3월께 출시 예정인 기아자동차의 오피러스 후속 모델 K9. 자동차 매니아들에 의해 여러 차례 포착된 K9의 스파이샷은 온통 위장막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게 K9이라는 사실은 쉽게 드러났다. 기아차가 해당 차량이 K9의 시제품임을 숨길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최소한 ´호랑이 코´ 그릴과 깔끔한 직선으로 마무리된 몸매는 감췄어야 했다.

#2. 오는 28일 출시 예정인 기아의 차기 소형차 신형 프라이드. 이 차의 디자인은 이전 프라이드와는 전혀 딴판으로, ´호랑이 코´ 그릴과 전면부보다 한껏 솟은 꽁무니는 준중형 ´포르테´와 판박이다.

#3. 지난 13일 개막된 ´2011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등장한 기아자동차의 스포츠 세단 콘셉트카 ´기아 GT´. 이 모델은 전형적인 스포츠카의 디자인을 지녔으면서도 전면부에는 여지없이 ´호랑이 코´ 그릴을 달고 나왔다.
 

▲ 기아차 패밀리룩을 적용한 차량들. 좌측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K5, 포르테, 프라이드, 쏘렌토, 컨셉트카 GT, 쏘울

이들 세 개 모델은 기아차 디자이너들의 ´게으름´ 혹은 ´재탕(再湯)정신´의 결과물이 아니다. 2008년부터 진행돼온 ´기아차 패밀리룩의 완성´을 상징한다.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의 기아차 사장 재직시절(2005년 3월~2009년 8월)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은 게 바로 ´디자인 경영´이고, 그 결과물이 기아차 고유의 패밀리룩이다.

정의선의 기아차 ´디자인 경영´ 선언

기아차에서 ´디자인 경영´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은 2005년, 바로 정의선 부회장이 기아차를 이끌기 시작한 시점이다.

▲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

당시 ´정의선의 기아차´는 품질·마케팅·기술·가격 등 기존 역량만으로는 선진업체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판단 하에 차별화된 경쟁 우위 요소로 디자인을 선택했다.

또, 현대차와 상당부분의 플랫폼을 공유하는 탓에 받아야만 했던 ´현대차와 형제차´라는 인식을 극복하고, 기아차만의 차별화된 정체성을 찾기 위해 디자인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결정하고 전사적인 디자인경영에 나섰다.

물론, 정의선 부회장은 전문적인 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지니진 못했다. 대신, 뛰어난 디자이너를 영입해 ´디자인 경영´의 선봉장으로 내세울 만한 안목과 과단성을 가진 경영자였다.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Peter Schreyer) 영입은 정의선 부회장의 ´디자인 경영´ 성공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됐다.

2006년 7월 기아차의 새로운 디자인 총괄담당 부사장 인사가 발표되기 전까지 자동차 명가 아우디와 폭스바겐의 디자인을 총괄하던 피터 슈라이어가 자동차 후발국 한국에서 근무하게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다.

´직선의 단순화´…일필휘지의 디자인

지난 3년여간 기아 로고를 달고 시장에 나온 차량들의 디자인을 보면 ´일필휘지(一筆揮之)´라는 성어가 떠오른다. 붓으로 단숨에 죽 내리그은 것 같은 간결함. 그게 기아차의 디자인 정체성이다.

피터 슈라이어는 기아차에 가장 어울리는 스타일로 ´심플하면서도 아름다운 라인´을 골랐고, 이는 2007년 4월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 주최 디자인 세미나에서 ´직선의 단순화(The simplicity of the straight line)´라는 기아차의 디자인 방향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그 결과물은 2008년 6월 로체 이노베이션을 통해 탄생했다. 후속 모델인 K5와 비교하면 다소 미완성인 듯한 디자인이지만, 현재 기아차의 디자인은 모두 로체 이노베이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기아차 패밀리룩의 모태´인 셈이다.

패밀리룩은 통상 차량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전면부, 그 중에서도 라디에이터 그릴과 헤드램프의 디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아차의 패밀리룩은 호랑이 코와 입을 모티브로 한 라디에이터 그릴, 이른바 ´호랑이 코´ 디자인이 가장 큰 특징이다. 이빨을 드러낸 호랑이의 코와 입모양처럼 그릴 상하단 라인의 가운데가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모양이다.

로체 이노베이션을 시작으로, 포르테, K5, K7, 프라이드 등 세단 뿐 아니라 스포티지R, 쏘렌토R 등 SUV와 박스카 쏘울까지 모두 패밀리룩을 새로 장착하거나 갈아입었다. 내년 3월께 출시되는 K9 역시 패밀리룩 대열에 합류할 예정이다.

패밀리룩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패밀리룩을 달고 나온 기아차의 모델들은 모두 히트했다. 특히 포르테와 K5는 각각 준중형차와 중형차 시장에서 ´형님´ 격인 현대차의 아반떼와 쏘나타의 아성을 위협하며 2009년 8월 현대차로 자리를 옮긴 이의선 부회장을 곤란케 했다.

현대차를 이끌며 자신이 구축한 ´디자인 강자 기아´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정의선의 ´디자인 경영 DNA´ 현대차로 이식되다

정의선 부회장이 현대차 기획 및 영업담당 부회장으로 임명되며 현대차에도 디자인 측면에 큰 변화가 생겼다.

현대차는 2010년형 쏘나타를 통해 기아차와 극명하게 구분되는 디자인 철학 ´플루이딕 스컬프처(Fluidic Sculpture)´를 세상에 선보였다.

´일필휘지´의 기아차와는 달리 현대차는 손이 많이 간 듯한 매끄러운 조각과 같은 느낌을 준다. 군더더기 없는 기아차의 바디와, 여러 개의 지느러미가 달린 듯한 현대차의 바디는 두 형제 기업의 확연한 디자인적 차별성을 나타내준다.

오석근 현대차 디자인 센터장(부사장)은 ´플루이딕 스컬프처´에 대해 "디자인 형태론으로는 공기역학적인 프로파일을 구현하고, 디자인 방법론으로는 창의적인 모델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현대차 패밀리룩을 적용한 차량들. 좌측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아반떼, 엑센트, 쏘나타

´플루이딕 스컬프처´는 현대차 ´패밀리룩´의 근간이 된다. 쏘나타를 시작으로 2010년형 투싼IX가 ´플루이딕 스컬프처´ 패밀리룩을 이어받았고, 2000년대 들어 디자인 측면에서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던 아반떼도 2011년형부터 ´플루이딕 스컬프처´를 적용한 뒤로는 호평을 받고 있다.

준대형 그랜저 역시 2011년형부터 쏘나타와 흡사한 디자인을 채택했고, 세단형 라인업의 막내급인 2011년형 엑센트는 전면부만 보면 신형 아반떼의 판박이다.

지난 1월 출시된 중형왜건 i40와 지난 13일 ´2011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서 공개된 준중형 왜건 신형 i30 등 비(非)세단형 모델들도 속속 ´플루이딕 스컬프처´ 패밀리룩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2012년형에서는 풀체인지가 이뤄지지 않은 싼타페 역시 이후 모델부터는 ´플루이딕 스컬프처´가 적용될 것이라는 게 현대차 측의 전언이다.

정의선 부회장의 이동과 함께 ´디자인 경영´과 ´패밀리룩´의 DNA도 현대차로 이식된 셈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패밀리룩을 통해 큰 성공을 거둔 기아차의 사례가 현대차의 패밀리룩 전략 본격화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패밀리룩은 세계적인 브랜드의 상징"

사실, 패밀리룩은 현대·기아차 외에도 널리 보편화된 트렌드다. 오히려 현대·기아차의 패밀리룩 채택은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에 비해 한참 늦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나 패밀리룩을 채택해 그것으로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현대·기아차도 일찌감치 패밀리룩을 채택했을 터.

자동차 업계에서는 패밀리룩은 장단점이 극명한 디자인 전략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선, 장점으로는 기업의 디자인 정체성을 뚜렷이 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BMW다. 세로로 양분된 전면 그릴만 보면 굳이 로고를 보지 않더라도 BMW임을 알아볼 수 있다.

또, 기존적인 디자인 베이스가 통일돼 모델 체인지에 따른 위험 부담이 적다는 것도 장점이다.

반면, 일단 패밀리룩으로 라인업을 구성하고 나면, 전면적인 디자인 변경이 힘들다는 것은 단점으로 꼽힌다.

브랜드 파워가 약할 경우, 소비자의 구매 선택에 있어 패밀리룩이 치명적인 마이너스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준대형차와 중형차의 디자인이 엇비슷할 경우 준대형차 보유자의 경우 자신의 차가 중형차로 오인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형차 보유자의 경우 준대형차의 이미테이션 모델을 몰고 다닌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구매를 꺼릴 수 있다.

종합해 보면, 높은 브랜드 파워와 패밀리룩으로 채택한 디자인 컨셉에 대한 충분한 자신이 있는 기업에게만 패밀리룩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포르쉐의 SUV 카이엔이 ´포르쉐 스포츠 쿠페의 고도비만형´과 같은 디자인을 하고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그 디자인이 카이엔이 포르쉐 가문의 일원임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징표이기 때문이다.

결국, 정의선 부회장의 패밀리룩 전략은 디자인 분야에서의 자신감을 기반으로 한 것이고, 패밀리룩 전략의 성공은 현대·기아차의 브랜드 파워가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과거의 현대·기아차가 양적 성장에 치중했다면, 현재는 질적 성장과 브랜드 측면의 자부심을 높이는 데 큰 비중을 두고 있다"며, "현대차와 기아차 패밀리룩이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지금은 해외 시장에서도 디자인 측면에서 일본 경쟁사들보다 앞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국 기자 (24pyk@ebn.co.kr) l 2011-09-20 16: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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