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esign Trend/기타

다양한 소수의 특별함을 위하여...이름없는’ 디자인에 눈 돌린 광주

2011 제4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9월 2일~10월 23일)를 가다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노자의 ‘도덕경’ 중 도경(道經) 첫 장에 나오는 말이다. “길을 길이라 말하면 그것은 길이 아니다. 이름을 이름이라 부르면 그것은 이름이 아니다.” 올해 제4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9월 2일~10월 23일)에서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와 공동 총감독을 맡은 건축가 승효상은 이 ‘도(道)’를 디자인을 뜻하는 ‘도(圖)’로 슬쩍 바꿔 붙였다. 그리고 던졌다. “디자인을 디자인이라 일컬으면 그것은 디자인이 아니다.” 그럼 뭐가 디자인인가. “20세기 근대성을 상징하는 ‘디자인’이라는 말이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게 됐다”고 전제한 그는 두 가지 키워드를 뽑아 들었다. ‘이름’과 ‘장소’다. 예전부터 권위가 있는 ‘이름 있는’ 디자인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만 분명 일상에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름 없는’ 디자인에 주목했다. 또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불분명해지고 다중의 보편성보다 다양한 소수의 특별함이 우선되는 시대, 장소와 무관하게 가치를 인정받았던 디자인에 이제 특별한 장소성이 요구되고 있음도 간파했다. 그가 추출한 키워드는 44개국 133명의 작가와 73개 기업이 만들어낸 131개 작품으로 담아냈다. 1일 오전 광주 비엔날레관 지하 1층 프레스 콘퍼런스장은 그 화두를 붙들어 보려는 국내외 기자들로 가득했다.

1 1일 오후 광주광역시 광주세무서 앞에서 김세진·정세훈 작가의 폴리 작품 ‘열린 장벽’ 

비엔날레관 장식한 4개의 독특한 도시
 
비엔날레관에는 전시장이 4곳 있다. 승 감독은 각 전시장을 ‘특별한 도시(비엔날레 시티)’로 설정했다. 제1 전시장은 정치성을 부각한 ‘클러스터 시티’, 제2 전시장은 사회적 관계에 초점을 맞춘 ‘네트워크 시티’다. 도시 문제와 가정 내 일상에 주목한 제3 전시장과 제4 전시장은 ‘랜드스크립트 시티’와 ‘그리드 시티’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각각 ‘유명(named)’ ‘무명(unnamed)’ ‘주제전-도가도비상도’ ‘커뮤니티’ 등의 테마를 맡은 큐레이터들은 전시장 성격에 맞게 작품을 분배했다.제1 전시장의 경우 “디자인이 단지 보기 좋은 형상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터전에 (좋든 나쁘든) 영향을 주고 또 받는 것”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예를 들어 ‘급조폭발물 장비’라는 코너는 다양한 사제폭탄의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반정부 운동가들이 사용하는 조악한 무기인데, 싸구려 재료를 이용하지만 화력은 강력하다. 여기에 대응해 더욱 정교하고 또 훨씬 비싼 새로운 무기가 만들어지는 아이러니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배어 나온다.

2 광주 장동 사거리에 마련된 후안 헤레로스의 폴리 ‘소통의오두막’. [광주=연합뉴스] 3 한국 건축가 안지용·이상화의 ‘바이크 행어’.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조직위원회 제공] 4 공동 총감독인 중국 아이웨이웨이의 설치작품 ‘필드’. [광주=연합뉴스]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제2 전시장이다. 사람들 간의 관계를 다룬 만큼 흥미로운 전시가 많았다. 게다가 한가운데 나무 구름다리를 설치해 관람객이 전시장 아래위를 오가며 새로운 각도에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올해 비엔날레의 차별점을 묻는 질문에 “건축가로서 디자인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싶었고 디자인의 ‘배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대답한 승 감독의 의도가 느껴졌다.도시의 로고를 이용해 지도를 만든 ‘한국과 유럽의 도시로고’는 각국 도시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이는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 ‘부유하는 가든’은 상추 등을 실제로 기르는 인공 정원이다. 관람객은 어둡고 축축한 공간(식물의 뿌리가 자라는)을 지나 위로 올라가면 전등불 아래 광합성을 하고 있는 다양한 야채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작품 ‘에너지!’ 설명을 들으면서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국내 작가들이 모인SMSM(사사[44]&박미나&최슬기&최민)은 서울~광주 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시판되는 ‘에너지 드링크’를 모두 구입했다. 총 77종이었다. 그리고 이를 모두 섞었다. “모두 정식 유통되는 제품이지만 혼합한 음료의 안전성은 보장할 수 없으며 따라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작가들의 면책동의서에 서명하면 한정판 원액 앰플(800개)을 얻을 수 있다.

5 운동선수들의 벗은 몸을 통해 시각디자인적 시선으로 몸을 바라보게 하는 

이밖에 ‘차도르’ ‘부르카’ ‘니캅’ ‘아바야’ ‘두파타’ ‘히잡’ 등 무슬림 국가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스타일의 여성용 베일이 어느 나라에서는 허용되고 어느 나라에서는 금지되는지 보여주는 ‘베일과 신체가리개’, 각국 정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여섯 가지 사형에 사용되는 도구를 그림과 함께 전시한 ‘처형 디자인’도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제3 전시장 입구에는 ‘바이크 행어’가 있다. 한국의 건축가 안지용·이상화의 작품이다. 좁은 공간에 자전거를 36대까지 보관할 수 있는 이 시설은 페달로 작동해 친환경적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한다. 중국 시골의 구멍 난 농구공이 양동이가 되고, 낡은 자동차 부품이 저개발국에서 인큐베이터가 되는 ‘착한 디자인’도 볼 수 있다.
 
‘운동선수 신체디자인’이라는 작품은 ‘몸’에 대한 관심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코너다. 길이 30m 벽에 부착된 사진은 종목별 남녀 운동선수의 다양한 체형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2m3㎝에 318㎏인 스모선수 에마누엘 야르브로우와 1m63㎝ 52㎏인 경마기수 론 워런 주니어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경이롭다. 이들이 어떻게 훈련하고 뭘 먹는지 적은 설명은 절로 눈길이 갔다.
제4 전시장으로 들어가면 홍콩의 새장 아파트(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다)와 뉴욕의 저가 고밀도 공동주택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광주 거리학’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살고 있는 작가 라이네케 오텐이 한 달간 광주를 돌아다니며 거리에서 낚아챈 장면을 모았다. 옛날식 빨간 우체통부터 슈퍼마켓 앞 플라스틱 의자, 파리채 등이 우리가 잊고 지내던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이날 비엔날레관 앞마당에는 공동감독 아이웨이웨이의 설치작 ‘필드’가 제모습을 드러냈다. 명나라 스타일의 푸른색과 흰색 꽃무늬 도자기로 만든, 가로세로 7m40㎝, 높이 1m15㎝의 격자형 비계 구조물이다. 승 감독은 “비로소 긴장감이 돈다”는 말로 그가 불참한 소회를 대신했다.

전시장 벗어나 ‘광주’와 만나는 폴리

올해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가장 큰 특징은 폴리다. 폴리는 사전적 의미로 장식적 역할을 하는 작은 건축물이다. 승 감독은 비엔날레가 전시장을 벗어나 광주라는 ‘장소’와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옛 광주 읍성길의 흔적을 좇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회관 도서관을 중심으로 금남로·충장로·황금로, 그리고 조성 중인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을 에워싸는 2.2㎞에 달하는 ‘길’을 구상한 뒤 이곳에 10개의 폴리를 설치하기로 했다. 그리고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건축가들에게 설계를 맡겼다. 이날 행사에 외신 기자 및 외국 작가들의 모습이 예년에 비해 유난히 눈에 많이 띈 것도, 쟁쟁한 건축가(1명만 불참했다)들을 한자리, 그것도 지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 아니었을까.

1일 오후 3시 금남로 공원 앞. 늦더위 속에도 200명이 넘는 국내외 인사가 모여들었다. 영국 런던의 BBC 음악극장을 건축한 것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알레한드로 자에라 폴로가 구상한 ‘유동성 조절’부터 준공식이 시작됐다. 그는 따로 놀던 거리와 공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아늑한 느낌을 만들어냈다. 작가의 설명이 끝나고 사람들은 공원을 향해 다 함께 종이비행기를 날리며 준공을 축하했다.

이어지는 행렬은 사람의 물결이었다. 날은 더웠지만 사람들은 무리 지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다음 폴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했다. 은빛 파이프를 엮어 새둥지처럼 만든 ‘광주사람들’(나데르 테라니·미국)과 건물 옥탑을 뚝 잘라낸 듯한 ‘서원문 제등’(플로리안 베이겔·독일)을 지나 환기구통으로 구름 형상의 설치물을 만든 ‘소통의 오두막’(후안 헤레로스·스페인)에 이르러 잠시 걸음을 멈췄다. 상인연합회가 준비한 막걸리와 식혜 등으로 더운 목을 축인 참관객과 주민들은 야경에 대한 기대에 더욱 설레는 모습이었다.

일본의 요시하루 쓰카모토가 기획한 ‘잠망경과 정자’는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거대한 배의 한가운데를 도려내 온 듯한 높다란 기둥은 광주시내 지도를 돛처럼 안았다. 기둥 끝에 설치한 잠망경은 평지에서도 산에서 보는 듯한 조망권을 선사했다. 아시아문화전당과 멋진 조합을 이룰 ‘사랑방’은 미국 건축가 프란시스코 산인의 작품. 준공을 축하하는 10대 청소년들의 힙합 댄스에 맞춰 거리도 함께 들썩였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독일 올림픽 사이클경기장 등으로 국제 건축계에서 명성이 높은 프랑스의 도미니크 페로는 옛 광주시청 사거리 한복판에 노란색 철골조 사각틀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날 4개의 문을 여는 이벤트를 했다. 선유도 공원, 이응노 생가기념관 등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로 꼽히는 조성룡은 ‘기억의 현재화’를 통해 황금로 사거리 한가운데에 야트막한 언덕 느낌을 버무려냈다. 광주폴리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김세진·정세훈의 ‘열린 장벽’은 마치 성벽의 돌처럼 길고 짧은 직육면체 발광다이모드(LED)등이 하늘을 향해 박혀 있는 독특한 모양새였다.
“이 설치물은 앞으로 광주문화재단이 관리하게 됩니다. 폴리 해설사들이 곳곳에서 거리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도시엔 이야기가 있어야 하거든요. 작은 폴리 하나하나가 광주 구도심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동료 건축가들과 기분 좋은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던 승효상 감독은 이 말을 마치고 다시 비엔날레관으로 향했다. 곧이어 오후 7시부터는 행사 참가자들이 다 함께 잔치국수를 먹는 것을 시작으로 올해 광주디자인비엔날레 개막식이 열릴 참이다. 

광주(전남)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 제234호 | 20110904 입력 | 중앙선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