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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 <19>작가노트

작품 감상에 작가의 안내는 정말 필요할까?

요즘은 여느 미술 전시장에나 긴 글이 벽에 붙어 있다. 입구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안내서가 비치된 것은 물론 작품마다 다시 자세한 설명이 붙기도 한다. 작가의 생애와 작품세계에 관한 글부터 작품의 제작 동기와 배경, 자세한 설명과 함께 평론가의 글과 큐레이터의 기획 의도가 쓰여 있을 테고,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이 친절하게 붙어 있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 이야기를 한다던 작품은 언제부턴가 읽고 들어야 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전시에 글이 많이 쓰이면서 이제 작가가 쓴 글, 작가 노트의 활용도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관람객은 작품 앞에서 보내는 시간만큼이나 텍스트를 읽는 데 시간을 할애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미술전시회의 연간 평균관람 횟수는 몇 년간 꾸준히 0.2회를 지키고 있다. 관람률은 2010년 기준 9.5%로 2006년 10.4%보다는 낮지만 2006년 6.8%와 2008년의 8.4%에서 조금씩 오르고 있다. 미디어에서 미술 관련 소식을 다루는 일도 빈번해지고, 대형 블록버스터형 전시 중심이긴 하지만 공연장이나 영화관이 아닌 미술관에서 재미를 찾으려는 시도도 늘어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전문 미술 해설사가 등장해 전시의 취지와 작품에 관한 설명을 이해하기 쉽게 스토리텔링을 해주며 ‘난해한’ 미술과 관객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해 주고 있다고 한다.

▲‘컴포지션 IV’(1911년 작, 바실리 칸딘스키, 캔버스에 유채, 159.5×250.5㎝,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미술전시관, 뒤셀도르프).

작가의 새롭고 독특한 시도가 예술전문가 집단과 일반인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사랑을 받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칸딘스키가 독일에서 처음으로 추상회화를 선보였을 때는 함부르크의 비평가 쾨흘러가 퍼부은 “얼룩진 색과 뒤얽힌 선으로 작품을 날조하는 편집증적인 건방지고 어린 청년”이라는 독설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칸딘스키가 쓴 책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비롯한 그의 추상작품 활동을 “하찮은 바보짓”이라고 했다.

러시아에서 건너와 활동하는 젊은 칸딘스키를 지원한 선두주자에는 최초의 추상 수채화 정기 간행물 ‘데어 슈투름(폭풍)’을 창간하고 같은 이름의 갤러리를 운영하며 아방가르드 미술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헤르바르트 발덴이 있었다. 그는 특히 지방 간행물에 들끓는 “생각 없고, 구식이며, 제대로 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한” 비평가들의 글을 신랄하게 공격했고, 모던한 경향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비평가들의 글을 발췌해 모아 풍자하며 그들이 “정신박약”하다며 가차없이 비꼬았다.

칸딘스키의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추상 미술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체계화한 저서로 20세기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이론서가 되었다.

▶‘무제’(1942년 작).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품 중 하나이다.

“이게 도대체 뭡니까?”

전시장에서 작가는 심심찮게 이런 질문을 받는다. 전시장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휙 하니 발걸음을 돌려 나가버리는 관람객보다 작품에 호기심을 갖고 물어봐 주니 반갑고 고마우면서도 대답하기가 여간 애매하지가 않다. 수상과 전시 이력이 작품 제작 방법과 함께 나열된 책자를 멋쩍게 내밀기도 한다. 책자 안에는 대부분 작가 노트가 들어가 있다. 작품을 제작할 당시의 감정을 담은 글도 있을 테고, 그러한 제작 방향을 선택하게 된 개인적인 배경과 사유과정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하려는 글도 있을 게다. 하지만 작가의 개인 노트가 늘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평론가들은 작품의 시각적인 매력에 끌리다가도 엉터리 문법에 앞뒤 맞지 않는 감상만 잔뜩 들어간 작가 노트를 읽는 순간 작품에 대한 관심이 싹 사라진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미술 비평가 에드워드 소젠스키는 “작가노트 100개 중 99개는 쓸모없고 터무니없다”고 했다. “잘 쓰지 못한 글이나 빈약하게 구성된 글”은 감상을 돕기는커녕 그를 작품과는 거리가 있는 “엉뚱한 방향”으로 보낼 뿐이라는 거다. 모든 미술작가가 문학가처럼 잘 짜인 글을 쓰길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의 말하는 법과 글을 쓰는 법이 상대를 평가하는 데 큰 영향을 준다며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을 덧붙였다.
 

◀‘침대’(1955년 작, 로버트 라우션버그, 191.180×20.3㎝, MOMA미술관).

글이 아니라 작품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작가와 전시장의 공간을 채운 저 ‘새로운 물건’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만든 것인지 알고 싶어하는 관람자의 눈싸움. 작가들은 그 멋쩍은 순간을 피하기 위해 작가 노트를 더 자세히 길게 쓰기도 한다.

보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것이 무엇인지, 왜 어디에 써야 하는지 늘 궁금해한다.

라우션버그는 그의 작품을 두고 회화니 조각이니 하며 혼란스러워 하는 이들을 위해 ‘컴바인’이라는 용어를 직접 만들어 냈다.

“사람들에게 제 작품을 보여줄 때면 어떤 사람들은 회화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그 작품을 조각이라고 했어요. 그러다 칼더의 일화를 듣게 되었죠. 알렉산더 칼더가 처음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었을 때 어느 누구도 선뜻 관심을 보이지 않더래요. 도대체 그것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서 말이에요. 칼더가 ‘모빌’이라고 이름을 붙여주자마자 사람들이 “아, 그렇군요. 바로 모빌이군요”라며 흥미를 보였다고 해요. 그래서 저도 ‘컴바인’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어요.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것의 모호한 경계를 없애버린 거죠.”

라우션버그는 글을 무척이나 잘 쓰는 미술작가에 속한다. 화술도 뛰어나다. 그가 컴바인의 첫 작품인 침대를 전시하며 “캔버스를 살 돈이 없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뭔가 그릴 만한 게 있나 주위를 둘러봤죠. 쓰지 않는 낡은 퀼트 이불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캔버스 틀에 걸었는데 베개가 없으니 이상해 보였어요. 그래서 베개도 넣고, 그렇게 침대가 된 거죠. 미리 계획하고 한 작업은 아니에요.”

그의 말은 어떠한 이론적인 글보다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없애려는 그의 작업 의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밀라노의 비앙코니 갤러리는 신진작가 지원프로그램을 통해 얼마 전부터 밀라노 출신 작가 다니엘레 베로네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아트 바젤42와 공동 개최되는 바젤 솔로 프로젝트에 베로네지를 선택했고, 베니스 비엔날레 기간에는 리도 섬에 위치한 대안공간과 협업해서 그의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파엔자에 있는 카를로 자울리 미술관에서 진행된 워크숍에 참여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갤러리의 디렉터 레나타 비앙코니는 다니엘레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신경 쓰고 컬렉터와 기자들을 대상으로 말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주입시키고 반복 연습시킨다. 작품도 물론 좋아야 하겠지만 결국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작가의 “말하기”라는 것이다.

▲‘뒤집힌 관점’(2011년 작, 다니엘레 베로네지, 설치, 밀라노 비앙코니 갤러리).

이탈리아의 주요 컬렉션 중 하나인 마티올리 컬렉션의 마티올리는 어느 자리에서건 작가들이 하는 이야기를 늘 주의 깊게 듣는 버릇이 있다고 했다. 작품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와 작품이 제작되는 과정을 작가의 일상 ‘수다’에서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시장에는 그래서 작가와의 인터뷰와 작품을 제작하는 모습을 편집한 영상물이 준비되기도 하고, 오프닝 외에 작가와 큐레이터, 컬렉터가 함께하는 워크숍을 진행하는 등 작품의 이해를 돕는 다양한 방법이 연구되고 있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입력 2011.08.21 (일)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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