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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화장실은 언제 집 안으로 들어왔을까?

일제강점기 - 현관 생기고 집 안에 변소 만들고 툇마루에 유리문 달아
1970년대 - 입식 부엌·실내 욕실 농촌엔 새마을 주택 보일러식 난방 보급, 서울엔 불란서 주택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
임창복 지음|돌베개|552쪽|2만6000원

오전 7시 잠에서 깬 A씨는 아파트 안방에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다. 같은 시각, 부인은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한다. 샤워를 마친 A씨는 발코니로 나가 화초에 물을 주고, 이어 고교생 딸과 함께 세 식구가 식탁에서 아침을 먹는다. 식사 후, A씨와 딸은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각각 집을 나선다.

2011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일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형태의 주택구조가 자리 잡기까지는 120여년이 걸렸다. 신간 '한국의 주택 그 유형과 변천사'는 임창복(65)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가 한국 주택건축의 120년 혁명사를 정리한 것이다. 책에서는 선교사와 외교관을 중심으로 한 서양건축과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이식된 일본식 주택문화가 전통 주택문화와 갈등과 화해, 타협을 거치며 진화해온 과정을 볼 수 있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자란 세대에겐 낯설겠지만 단독주택 경험이 있는 독자에겐 반가울 책. 학술적인 내용이지만 단독주택 120년 역사를 파악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앞으로 아파트문화의 역사를 다룬 책이 출간되기를 기다리는 마음도 생긴다.


◆현관(玄關)의 탄생

1876년 개항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은 주택을 직접 짓거나 한옥을 개조해 입식(立式) 주거공간을 선보였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다. 본격적으로 조선의 주택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 한반도로 대거 이주한 일본인들이 들여온 집 구조 중 한국인들의 눈에 독특한 점은 다다미와 중복도(中廊下) 그리고 현관이었다. '현관(玄關)'이란 한자에서 보듯 원래 일본에서는 집의 북쪽이나 측면에 있는 '어스름한 공간'이 현관이었다. 다다미와 중복도는 일제의 패망과 함께 사라졌지만 현관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어두운 곳이 아니라 집의 밝은 곳에 있어 '명관(明關)'으로 바뀌었다. 일부 고급 한옥에서 처음 채택된 현관은 한옥과 양옥을 거쳐 현재의 아파트까지 이어지고 있다.

◆"변소(便所)를 집 안으로"

변소 문제는 전통 주택에서 가장 골칫거리였다. 1896년 독립신문에 "길갓집 창밖에 더러운 물건과 오줌과 물을 버리지 못하게 하고 어른과 아이가 길가에서 대소변을 보지 못하게 하고…"라고 적을 정도였다. 1934년 조선총독부는 변소와 전쟁을 선포한다. '조선시가지계획령'에서 "거주용 건물 부지 내에 변소 설치할 것"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마침 당시엔 도시형 한옥을 공급하는 '집장수'들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안방에서는 멀고 대문간에서는 가깝고 수거에 편리하게 길에 면한 위치에 변소가 들어온 집이 대량 보급된다. 또 'ㅁ' 'ㄷ'자 집이 늘면서 담장 없이 벽으로 이웃한 도시형 한옥이 늘게 됐다. 일제 강점기는 유리가 건축재료로 널리 쓰이게 되면서 툇마루에 유리문을 다는 것이 유행했다. 덕택에 방과 마루, 방의 앞쪽 면적이 요즘의 아파트 발코니처럼 쓸모 있는 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하게 됐다.
 

▲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유행했던‘도시형 한옥’들(왼쪽)과 1970년대 후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농촌주택 개량사업 현장을 방문한 모습. 위의 사진은 서울 강남의 아파트촌. /조선일보·돌베개 제공

◆재건주택

1945년 광복은 한국에 본격적인 '집 문제'를 제기했다. 해외동포 귀환으로 인구가 증가한 데다 6·25로 주택들이 파괴되면서 주택 건설은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다. 전후에 떠오른 것은 이른바 '재건주택'. 국제연합한국재건단 등의 지원을 받아 건평 9평에 방 2칸, 마루 1칸, 부엌 1칸짜리 흙벽돌로 지은 '후생주택'(재건주택)이 전국적으로 건설됐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내 건축가들에 의해 표준화된 도시형 주택 건축이 늘었다.

◆'새마을 주택' '불란서 주택'

1970년대 이전까지 도시와 상류층이 주거문화를 바꿨다면, 1970년대 이후는 농촌과 도시 중산층의 주택 형태도 크게 바뀐 격변의 시대였다. 대표적인 예가 '새마을 주택'. 당시 내무부가 12종류, 건설부가 15종의 표준 설계도를 제시하는 등 정부의 강력한 주도로 농촌 주택 풍경을 바꿔놓았다. 입식 부엌과 실내 욕실이 들어선 집이 생겼다. 도시에서는 이른바 '불란서 주택'이 대유행했다. 불란서 주택은 보일러 난방의 보급과도 밀접하다. 1972년 90%가 연탄 난방을 하던 서울 주택은 1977년이 되면서 보일러식 난방이 90%로 늘어났다. 지하(반지하)에 보일러실이 들어앉고 '미니 2층'식으로 다락이 보편화되거나 2층집이 늘었다. 지붕과 지붕이 만나는 삼각형 모양이 서구의 신전처럼 보이는 집을 '불란서 집'이란 별칭으로 불렀다. 이 무렵부터 가옥 구조를 부르는 이름도 서서히 바뀌게 됐다. 변기, 세면대와 목욕 공간이 합쳐져 '변소'가 아닌 '화장실'로, '부엌'은 '주방', '마루'는 '거실'로 좀 더 '고급스러운' 이미지의 이름으로 변신했다.

김한수 기자 hansu@chosun.com

기사입력 : 2011.08.19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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