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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단순하게, 어울리게...그것이 우리의 디자인 철학

자동차 디자인의 마에스트로 피닌파리나를 만나다

피닌파리나(Pininfarina) 패밀리의 원래 성은 파리나였다. 창업주인 바티스타 피닌파리나의 키가 작아 사람들은 그를 지방 사투리로 작다는 뜻의 피닌(Pinin)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러다가 1961년 이탈리아 사회와 산업 발전에 대한 바티스타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 이탈리아 대통령이 그의 애칭인 ‘피닌’과 원래 성인 ‘파리나’를 합친 개명을 대통령령으로 인가하면서 그들의 성은 공식적으로 ‘피닌파리나’로 바뀌었다. 바티스타가 회사를 설립한 것은 1930년. 당시엔 주로 의뢰를 받고 혁신적이고 우아한 수제품 럭셔리 차를 만들었다. 300여 명의 직원이 1년에 500대 정도의 차를 만들었는데 디자인이 200가지나 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50년대 초부터 페라리와의 역사적인 협력작업이 시작됐다. 또 알파로메오·벤틀리·롤스로이스·피아트·푸조· 시트로앵·GM미쓰비시·혼다, 그리고 현대(라비타)나 대우(레조, 라세티) 등과도 손을 잡았다. 현 회장은 파올로 피닌파리나. 2008년 회장이던 형 안드레아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피닌파리나의 회장으로, 87년 자신이 세운 산업 디자인 회사 ‘피닌파리나 엑스트라’의 디자이너로, 자신의 다섯 자녀는 물론 형이 남긴 세 자녀도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는 아버지로 일인다역을 하고 있다. 그를 만나기 위해 본사가 있는 토리노의 위성도시 캄비아노를 찾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할아버지는 유명하고 부자이며 사회에서 인정받는 다정하고 환상적인 아티스트로, 한마디로 우리에겐 신화 같은 존재였다. 아버지(세르지오 피닌파리나)는 고집이 세고 엄격하고 완고하고 신중하고 정확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선물을 많이 주셨지만 아버지는 선물보다는 돈의 가치를 알게 해주려고 노력하셨다. 사회주의와 테러리즘으로 혼란기였던 이탈리아의 70년대를 보내며 아버지는 ‘너희 자신을 위해 공부해라. 피닌파리나에 와서 일할 생각으로 공부하지는 말아라’고 하셨다. ‘언젠가 회사를 정리할 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아버지의 그 말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런 줄 알면서도 오히려 우리에겐 자극이 되었다.”

-디자이너로서 할아버지의 능력을 말한다면.
“할아버지는 자동차 디자인이나 모델을 보고 어디를 어떻게 수정·보완해야 완벽한 디자인이 나올지 아는 재주가 있었다. 어딘지 모르지만 흡족하지 않은 부분이 있을 때 ‘차 지붕을 2mm만 낮춰 봐라’ 혹은 ‘트렁크를 5mm만 넓혀 봐라’ 등의 미세한 수정 지시를 내렸고, 그렇게 개선된 제품들은 완벽했다.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는 능력, 모자란 부분과 넘치는 부분을 구별해 내는 능력은 그와 팀을 이루고 있는 직원들, 협조자들, 그리고 아버지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이런 것들이 시간이 지나며 피닌파리나의 실력이 되었다.”

1 마세라티 버드케이지 피닌파리나 75주년 기념작 

경험(Experience), 창조(Creativity), 그리고 혁신(Innovation). 이 세 가지는 피닌파리나가 설립 당시부터 추구하고 있는 기본 가치다. 창립자 바티스타는 이탈리안 디자인을 ‘선과 균형의 어울림, 그리고 단순함’이라고 정의했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어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것, 이것은 곧 ‘경험’을 뜻한다. 2대 회장 세르지오 피닌파리나는 ‘형태의 아름다움은 고품질의 제품을 만들고자 몰두한 결실’이며 동시에 ‘디자인은 형태와 기술, 취향과 기능이 만나는 정점’이라고 했다. 이는 ‘창조’를 의미한다. 그리고 전 회장이었던 안드레아 피닌파리나는 ‘우리에게 도전이란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몇 년 안에 모든 자동차들은 필수사항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이 모두 가지치기가 되면서 기능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조력과 혁신의 결합이 필수다’라고 하면서 ‘혁신’을 얘기했다.

2 줄리엣다 스파이더 3 마세라티 그란 카브리오 

-피닌파리나와 페라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엔조 페라리와 바티스타 피닌파리나의 첫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두 분 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엔조 페라리는 스포츠카 분야에서 최고였고 할아버지는 자동차 디자인 분야에서 최고였다. 피닌파리나는 럭셔리 자동차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피닌파리나의 실력을 스포츠카 부분에도 응용해 보고 싶어했다. 페라리는 차는 많이 생산했지만 아직 그들만의 이미지나 아이덴티티가 없는 상태였다. 그들만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바람은 스타일리스트나 기술자, 파일럿을 자주 바꾸게 했었다. 할아버지는 한번 쓰고 버려지는 일회용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엔조 페라리에게 ‘난 피닌파리나다. 차 디자인을 해줄 테니 네가 와라’라고 했고 엔조 페라리는 ‘내가 페라리인데 네가 마라넬로로 와라’라고 하며 서로 줄다리기를 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고속도로도 없었고 400km 이상을 차로 간다는 것은 무리도 있었거니와 만일 일이 성사되면 일이 있을 때마다 그 길을 달려야 한다는 생각이 이들을 어렵게 한 것 같다.”

-그럼 어떻게 해결했나.
“아버지가 해결책을 찾았다. 중간 지점에서 만나게 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이 일을 아버지에게 맡기고자 했는데, 페라리는 펄쩍 뛰었다. 할아버지가 디자인 마에스트로인데 당시 25세밖에 되지 않은 아버지에게 일을 맡길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항상 컨트롤할 것이고 이 일은 장기적 협력관계로 가야 하기 때문에 항상 이 일에 매달릴 사람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결국 아버지에게 일을 맡겼다. 처음에 아버지가 프로젝트를 가지고 페라리에 갈 때마다 그들은 할아버지에게 연락해 디자인을 봤는지 물어보곤 했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퀄리티가 그들이 원하던 것임을 알고 아버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엔조 페라리는 아버지에게 ‘우리 이제부터 말 놓고 지네세’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51년부터 60년까지 약 40대의 페라리를 디자인했고 아버지는 2003년까지 그의 두 배를 디자인했다. 그 뒤를 형이 2008년까지 했고, 형이 죽은 후부터 내가 맡고 있다.”

4 니도 2004년 5 알파로메오 100주년 기념‘두에토탄타와 파올로 피닌파리나 

-페라리는 자체 디자인 개발을 하지 않나?
“왜 안 하겠나? 몇 년 전부터 페라리 디자인 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프로젝트, 차 디자인 등의 협력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와는 선의의 경쟁이다.”

-그럼 페라리와는 계속 일하나?
“최대한 장기적 협력을 직접 유지할 것이다. 페라리는 피닌파리나 가족 일원의 참여를 꼭 원한다. 음식의 마지막에 후추를 치듯 마지막 터치는 피닌파리나 가족의 일원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 형이 그랬듯 나도 이 일을 계속 할 것이다. 1년에 10번 정도 마라넬로에서 열리는 페라리의 회의와 프레젠테이션에는 꼭 참석한다.”

-페라리 외 다른 회사들의 자동차 디자인도 직접 관리하나?
“회장이 모든 디테일을 관리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지만 현재 중국의 다섯 회사와 인도의 두 회사는 직접 컨트롤한다. 페라리는 특별 케이스다.”

-피닌파리나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2년 정도마다 선보이는 컨셉트카다. 우리의 모든 역량을 보여준다. 2005년 마제라티 버드케이지, 2008년 피닌파리나 신테지에 이어 특히 2010년 설립 80주년 기념이자 알파로메오 100주년 기념으로 내놓은 ‘두에토탄타(2uettottanta)’가 대표적이다. 전기차 니도(NIDO)도 중요하다. 이번에 새로 영입한 파비오 필리피니(47·전 르노 근무)에게 ‘정말 멋지고 획기적인 차를 기획해서 현재 본사 1층에 자동차박물관 중앙에 전시된 페라리 FF를 끌어내려라’라고 농반진반으로 얘기한다.”

모든 디자인이 무(無)에서 창조되는 것은 아니다. 피닌파리나는 과거에 이미 제작되었던 자동차들에서도 많은 영감을 얻는다. 마세라티 그란 투리스모는 1954년 A6 GCS 쿠페에서, 페라리 FF는 기존의 페라리 458에서, 그리고 알파로메오의 두에토탄타는 알파로메오가 60년대 출시한 두에토(Duetto)에서 각각 영감을 받아 현대적 라인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전기차에 관심이 큰 것 같다.
“니도는 전기로만 가는 시티카다. 2009년 프로젝트를 시작해 2010년 5월 첫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휘발유는 1분이면 주유하지만 전기차는 충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이 차가 우리의 미래다. 대도시에서 환경오염을 시키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운반할 차량의 개발은 필수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형 전기차는 현재 여러 회사에서 생산 중이고 앞으로 더 많이 개발될 것이다.”

-‘오토립(AUTOLIB)’이라는 파리의 전기차 카 셰어링(Car Sharing: 필요한 시간만큼 차를 사용하고 지정된 장소에 반납하는 방식)에 기여한 공로로 이탈리아·프랑스 상공회의소가 수여하는 ‘2011 올해의 인물’에 최근 뽑혔다.
“전기차의 카 셰어링은 배터리에 대한 불신을 부분적으로나마 해결해 준다. 즉 배터리만 바꾸든가, 차 전체를 바꾸든가, 배터리에 문제가 없다면 배터리는 유지하고 차만 바꾸든가 하는 것이다. 전기엔진은 수명이 길어 20년 정도 사용할 수 있지만 배터리의 수명은 5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5년 후엔 배터리만 바꾸고 전기엔진은 유지해도 된다. 이것은 기존의 자동차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의 제품이다. 하나의 동력시스템이지 단순한 개인 자동차가 아니다.
무엇보다 배터리 사이즈가 관건이다. 배터리는 바퀴에도 넣을 수 있다. 모든 것은 기술이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달렸다. 사회는 가장 쉽고 혁신적인 배터리에 상을 줄 것이다. 그렇더라도 BMW, 페라리와 같은 차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토리노 김성희 중앙SUNDAY매거진 유럽통신원,사진 피닌파리나 제공 | 제226호 | 20110710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