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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 〈11〉 공격받는 예술

작품 만들 때 실험정신·대중기호 접점 모색 바람직

얼마 전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던 고갱의 작품 ‘타히티의 두 여인’에 한 중년 여성이 달려들어 외설적인 이 그림을 없애야 한다고 외치며 작품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주먹으로 부수려는 시도를 했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사명감에 들떠 설치던 여성의 이름은 수잔 번스. 그녀는 고갱은 악마이고 그 그림은 불살라 버려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많은 예술작품이 빈번한 공격을 받아왔다.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야간 순찰’이 여러 번에 걸쳐 난도질을 당하거나 산(酸·acid)을 덮어썼고 미켈란젤로의 조각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가 휘두르는 망치에 코와 눈이 날아가기도 했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다이너마이트에 두 발을 잃는 수모를 겪었고,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반복되는 테러를 피해 방탄유리 뒤로 숨어야 했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랴’. 뉴먼은 몬드리안의 순수주의에 대항해 몬드리안의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을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그렸다고 한다.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정신이상자들의 공격을 제외하더라도 많은 예술작품들은 운반 과정에서의 부주의로 훼손되거나 컬렉터, 관람객의 실수로 손상을 입기도 하고 선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게릴라적 퍼포먼스에 희생되기도 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구체제가 광장 한가운데 세워 놓은 대형 조형물에 성난 군중이 기어올라가 부수고 끌어 넘어뜨려 산산조각내는 행위는 비극적이면서도 동시에 신들린 축제적 퍼포먼스를 상상하게 해주는데 조형물이 지닌 역사적, 예술적 가치나 경제적 가치와는 동떨어진 정치적 상징성 때문이었다.

‘불안한 오리’(야스거 요른, 1959년 작). 요른은 실제 존재하는 작품 위에 새로운 작품을 더하는 현대적으로 ‘방향전환’한 작품을 선보였다. 코브라 그룹은 각 멤버의 출신 국가인 덴마크·벨기에·네덜란드의 수도 머리글자를 조합해 만든 이름으로 요른은 덴마크 출신 작가이다.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 감독의 러시아 10월혁명을 그린 영화 ‘10월’에서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상이 군중에 의해 끌어내려지는 장면은 어떠한 설명이나 상황묘사보다 뛰어난 전달력으로 시대가 바뀌었음을 전달해 주었다.

매스컴을 통해 전 세계로 뿌려진 블라디미르 레닌·마오쩌둥·사담 후세인 등의 넘어지고 부서진 동상의 사진처럼 극적인 과정을 거치진 않지만 아직도 선거철이 지나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권의 잔재를 씻어내듯 작품이 깨끗하게 교체되기도 한다.

20세기 초 미래주의와 다다이즘 작가들이 기존의 예술이나 정치·문화 역사적 가치체계를 거부하고 전복시키며 모던아트를 탄생시켰지만 급진적인 메시지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폭력적인 공격을 받기도 했다. 1957년 만 레이의 전시 중 예술대학 학생들이 전시장으로 몰려들어와 난동을 부렸고, 그 와중에 ‘파괴되어야 할 오브제’라는 이름의 작품을 파괴해 버렸다. 만 레이는 7년 후 같은 작품을 만들어 ‘파괴되지 않는 오브제’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하우스’(레이첼 화이트리드, 1993년 작). 사라져가는 빅토리아시대 주택의 내부를 통째로 시멘트로 캐스팅한 작품. 그녀는 이 작품으로 여성 최초로 터너 상을 수상했다.
 
36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레디메이드를 대표하는 뒤샹의 소변기 ‘샘’은 전시장에 뛰어든 사람들의 분노에 찬 소변 세례를 받기도 했는데 결국엔 소변기라는 기성품의 본질적인 의미를 다시 돌려주려는 목적이었다는 변명 앞에서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숭고 미술의 대표작가로 뽑히는 바렛 뉴먼의 그림도 백만 달러라는 작품의 액수가 자신을 공포로 몰아넣는다는 이유로 분노한 조셉 N 클리어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관람객이 작품과 거리를 두도록 세워 놓는 플라스틱 봉으로 그림에 구멍을 뚫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뉴먼의 작품은 1986년과 1997년에 걸쳐 칼질을 당하기도 했는데 추상화와 사실주의에 반감을 가졌다고 실토한 반 블라데렌이라는 이름의 집요한 젊은 작가에 의해서였다.

이런 반달리즘적 공격이 파괴가 아니라 작품을 위한 선행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미국에서 전시 중 스프레이 세례를 받았는데 당시 젊은 예술가라고 스스로를 밝힌 토니 샤프라치는 예술작품을 소유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라고 했다.

1974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의외로 토니 샤프라치는 당시 예술계에서 상당한 지지를 끌어냈고 현재 뉴욕에서 이름을 날리는 딜러가 되었다. 토니 샤프라치에 따르면 피카소 역시도 동료작가 모딜리아니에게서 구입한 그림 위에 다른 그림을 그려 넣은 적이 있다고 한다.

‘파괴되지 않는 오브제’(만 레이, 메트로놈에 사진). 1923년 ‘파괴되어야 할 오브제’라는 이름으로 제작됐다가 1957년 반 모더니즘 학생들에 의해 훼손되었고 1964년 다시 만들어졌다.

코브라 그룹의 아스거 요른도 남의 작품에 자신의 작품을 그려 넣은 걸로 유명하다. 요른은 무명작가가 그린 키치적 풍경화 작품에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그림을 덧발라 그렸다. 그의 전환적 개념에서 비롯된 시도에 찬사가 쏟아졌을 뿐 어느 누구도 원작자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원작자의 죽은 예술·키치·무가치적 그림에서 아스거 요른은 성공적으로 ‘방향전환’을 이끌어냈다는 거다.

요른은 “컬렉터들과 미술관들은 모던해져야 한다. 하지만 구식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는 없다. 기억을 재정비하되 방향을 전환해 우리의 시대에 맞도록 하면 된다. 몇 번의 붓 터치만 하면 현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데 왜 오래된 것을 거부하려고 하나”라고 주장했다.

새로운 예술이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데에는 늘 시간이 걸렸다. 대지미술을 대표하는 크리스토는 1962년 처음으로 오브제를 싸는 행위를 선보이지만 예술계나 일반인의 호응은커녕 단 한 점도 팔지 못하고 전시를 끝마치게 되었다.

그의 전시 오픈에 구경을 간 백남준은 크리스토가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의 피아노에 광목을 말고 흰색 페인트를 발라놓은 것을 보고 불만을 터뜨렸고, 전시가 끝나고 반납받은 피아노에 붙은 ‘이물질’을 말끔히 긁어내 없앴다고 한다.

이 오브제는 크리스토의 포장 오브제 연작의 첫 작품이었다. 전시 후 사람들의 냉담한 반응에 실망한 크리스토는 남은 작품들도 모조리 고물상에 넘겨 버렸다.

예술작품이 공공미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공감대 형성의 여부는 더욱 적극적으로 작품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었다. 공모전을 거쳐 설치된 작품이라도 일반인의 취향과의 괴리감이 커서 반발에 부딪혀 철거되는 경우도 있었다. 리처드 세라의 ‘기운 호’와 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작품 ‘집’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세계 곳곳의 유명 미술관 입구를 장식하는 대가의 작품도 광장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불편함’ 앞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리드의 ‘집’은 예술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저명한 터너 상을 그녀에게 안겨주었지만 흉물로 몰려 철거되고 현재에는 사진만이 남아 있다.

‘게이츠-센트럴 파크를 위한 대지미술 프로젝트’(크리스토와 장 클로드 부부, 프로젝트 드로잉, 사진, 볼프강 폴츠).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미술 전문인을 상대로 작품의 예술성을 따지기에 힘겨워하는 대중도 공공장소에 침범해 있는 작품의 좋고 나쁨, 아름답고 추함을 외칠 때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공공의 돈으로 세워지는 작품에 권리를 찾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예술계의 지지는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크리스토와 장 클로드 부부는 그동안 대지미술을 진행하는 기업 지원금을 일체 거절하고 프로젝트의 드로잉이나 대지포장에 사용되는 재료를 붙인 콜라주 작품을 판매해 충당했다고 한다. 작품의 주체를 잃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공공미술로 설치되었던 벽화가 훼손되는 등 관련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찾는 노력이 커지고 있다. 시각 예술품을 파괴와 변형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지만 작품이 공공미술의 형태로 들어왔을 때에는 작품을 취급하는 주체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제도에 맡기기보다는 작품의 선정과 제작 과정에서 대중의 기호와 작가의 실험정신이 마주치는 점을 찾는 적극적인 노력이 함께 이뤄져야 할 것이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입력 2011.02.13 (일) 11:12, 수정 2011.02.13 (일)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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