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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글로벌 디자인 코리안 영 파워] <4> 美 루나디자인 성정기 시니어 디자이너

“이웃 살피고 지구 살리는 디자인철학 실천”

《“지금 우리 책상 위에 있는 수많은 펜들은, 이미 펜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된 제품입니다.” 성정기 디자이너(40)가 내놓은, 얼핏 뚜렷하지 않게 들리는 이 말은 그가 ‘유니세프 프렌드’라는 이름으로 디자인한 볼펜을 보면 명확해진다. 그 디자인의 키워드는 엽서와 펜의 결합이다.》

◀디자인의 영역을 소비를 위한 상품에 국한하지 않고 인류 보편의 혜택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성정기 디자이너 (40). 그는 “동료와 가족이 내 디자인을 재미있다고 할 때 가장 기쁘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성정기 씨

2005년 5월 사하라 사막. 여행 중이던 성 씨는 한 유목민 소녀를 만났다. 초라한 모습의 소녀는 그에게 뭔가를 원하는 듯했다. 말이 통하지 않던 그는 소녀에게 많지 않은 돈을 내밀었지만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과자도 소녀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잡화가 담긴 가방을 펼쳐 보이자 소녀는 색연필 하나를 집어 들고 수줍은 미소를 지은 채 돌아섰다. “그때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주변에 상점이 없는 곳에서는 펜을 구하기 힘들겠구나. 세상에는 저런 처지에 있는 아이가 적지 않겠구나….”

이렇게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그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사람들이 보내는 엽서에 볼펜심을 결합했다. 아이들이 엽서를 읽은 뒤 볼펜심을 중심으로 돌돌 말면 볼펜으로 활용할 수 있는 엽서다.

이처럼 성 씨는 사람과 환경, 지구를 배려하는 디자인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불편한 수도꼭지’로 불리는 작품은 물이 나오는 꼭지가 바닥과 평행하게 사용자 쪽으로 튀어 나와 있다. 간결해 보이는 외형이 전하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하다. 기존 수도꼭지는 아래로 향해 있기 때문에 물을 많이 틀어도 이를 알아채기 힘들지만 성 씨의 수도꼭지는 물이 사용자 쪽으로 튀기 때문에 물의 양을 적절히 조절할 수밖에 없다.
 

▶물을 많이 틀면 사용자에게 물이 튀도록 디자인한 절약형 수도꼭지.

‘지구를 생각하는 휴지통 뚜껑’도 흐뭇한 웃음을 자아낸다. 휴지통의 뚜껑을 지구를 상징하는 도안으로 만들어 쓰레기를 버릴 때 마음이 불편하도록 만들었다. 지구를 상징하는 도안 사이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휴지를 버리거나, 지구 문양의 뚜껑을 빼내고서야 쓰레기를 담을 수 있다. “기존 휴지통은 쓰레기를 잘 담을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죠. 저는 쓰레기를 버릴 때 약간의 불편함을 주고, 그때마다 지구 문양을 보여줌으로써 ‘지구를 생각하세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디자인은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거대한 축인 ‘소비’에 갇힌 디자인이 아니다. 디자이너는 휴대전화나 자동차, 냉장고와 같은 소비재만 디자인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득과 재미를 제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엽서를 받은 오지의 아이들이 엽서를 돌 돌 말면 볼펜이 되도록 디자인한 ‘유니세프 프렌드’.

그는 2005년 영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면서도 세계 최대 산업디자인 전문회사인 미국 IDEO에 첫 한국인 디자이너로 입사했다. IDEO의 창업자 중 한 사람이자 인터랙션 디자인 분야를 개척한 빌 모그리츠가 그를 추천한 것이 계기였다. 성 씨는 2001년 LG전자 국제디자인전 공모전 수상 작품 설명회 때 자신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던 그에게 포트폴리오를 보내 인정받았다. IDEO는 그에게 숙소와 개인 영어교사까지 제공했다.

그러나 IDEO가 제품 개발에 초점을 맞춘 디자인에 집중하면서 그는 200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루나디자인으로 자리를 옮겼다. 혜택의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에 관심을 두는 만큼이나, 업무 시간에도 개인 작업을 허용하는 루나디자인의 제도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좋은 디자인을 위해 ‘첫 느낌’을 소중히 여긴다. “여행이나 일상에서 받은 영감을 잘 기록해 뒀다 자신의 스토리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디자이너는 세상에 처음 나오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인 만큼 첫인상을 잘 저장해 자신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전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눈을 감고서 샴푸와 린스 용기를 구분하지 못했던 경험을 살려 시각장애인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각각 세로 홈과 가로 홈을 낸 샴푸와 린스 용기를 개발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쓰레기를 버리면서 지구를 생각하도록 디자인한 휴지통 뚜껑.

그는 “외국에서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을 하기 위해 전문 디자인회사를 선호하는 반면에 국내는 여전히 특정 제품만 디자인하지만 경제적 안정성이 높은 일반 대기업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국내외 디자인 환경의 차이를 지적했다.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을 좀 더 당당하게 추구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의 문화와 제도가 더 다양한 가치를 인정해 주는 방향으로 변화했으면 합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성정기 디자이너는… ::

△2001년 LG전자 국제디자인 공모전 금상
△2002년 LG생활건강 디자인 공모전 대상
△2002년 소니코리아 디자인 공모전 대상 공동 수상
△2003년 독일 iF 콘셉트상
△2003년 국민대 공업디자인학과 졸업(제품디자인 전공)
△2005년 세계 최대 디자인전문회사 미국 IDEO 입사
△2006년 일본 나고야 디자인 공모전 입선
△2006년 미국 루나디자인 입사
△2007년 미국 시카고 굿디자인상
△2007년 덴마크 인덱스 어워드 입선
△2007년 독일 레드닷 콘셉트 어워드 ‘베스트 오브 더 베스트’상
△2008, 2009년 지식경제부 산하 한국디자인진흥원 차세대 디자인 리더 선정
△2011년 현재 미국 루나디자인 산업디자인팀 시니어 디자이너

기사입력 2011-02-14 03:00:00 기사수정 2011-02-14 15:2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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