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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패션

베르사체아르마니… 무대의상의 명품을 빚다

김성희의 유럽문화통신: ‘패션 극장-무대 의상, 위대한 스타일리스트’전, 2월 20일까지 이탈리아 마주켈리 뮤지엄밀라노 

1 조르지오 아르마니가 요아킴 코르테스를 위해 제작한 발레복, 2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위해 안토니오 마라스가 만든 의상, 3 안나 카테리나 안토나치가 입었던 로베르토 카푸치의 의상, 4 카티아 리챠렐리의 1986년 파리 공연을 위해 로베르토 카푸치가 제작한 의상, 5 빈첸조 벨리니의 오페라 노르마를 위한 로베르토 카푸치의 의상, 7 잔니 베르사체가 제작한 1990년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 의상, 8 잔니 베르사체가 키리 테 카나와를 위해 제작한 의상 

패션 스타일리스트들은 무대의상도 디자인한다. 이 의상들은 고급정장인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보다 더 화려하기도, 서민의 옷보다 더 평범하기도 하다. 1월 19일부터 2월 20일까지 이탈리아 북부 도시 브레샤의 마주켈리 뮤지엄에서 열리는 ‘패션 극장-무대 의상, 위대한 스타일리스트’는 전설적 패션 디자이너들의 무대 의상을 한자리에 모은 보기 드문 전시다. 지난해 말 로마의 폰다치오네 뮤지엄에서 한 달간 큰 호응을 얻었던 전시를 이곳으로 옮겨왔다.

잔니 베르사체를 비롯해 발렌티노·조르지오 아르마니·펜디·미쏘니·로베르토 카푸치 등 이탈리아 패션계를 대표하는 거장들이 디자인 및 제작을 하고 루치아노 파바로티·몽세라 카바예·카를라 프라치·키리 테 카나와·루치아 알리베르티 등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와 발레리나들이 입은 오리지널 무대의상들이다. 동시대 문화와 예술이 접목된 이 ‘작품’들은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예술성과 창작성, 그리고 퀄리티를 확실히 보여준다.이 전시는 밀라노의 스칼라좌, 밀라노의 피콜로 테아트로, 로마 오페라 극장, 파르마 레지오 극장, 나폴리 산 카를로 극장, 워싱턴 DC의 내셔널 오페라의 컬렉션과 의상을 제작한 각 브랜드의 협찬, 그리고 이 의상들을 입었던 오페라 가수들과 배우들의 참여로 성사됐다.

6 잔니 베르사체가 만든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의상 
 
‘알타 모다(Alta Moda)’, 즉 오트 쿠튀르가 무대 의상에 입문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프랑스 디자이너 폴 프와레나 영국의 찰스 프레드릭 워스부터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24년 당시 흥행의 귀재로 불리던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디아길레프가 장 콕토의 구상을 토대로 만든 발레 ‘블루 트레인(Le Train Bleu)’을 꼽는다. 이 작품의 의상을 맡은 사람은 바로 코코 샤넬. 이 무대 이후 수많은 극장과 패션 스타일리스트들의 협력작업이 이뤄졌다. 특히 80년대 초반부터 이탈리아 패션 디자이너들의 무대의상 진출이 본격화됐다.

 
브레샤 시에서 30㎞ 정도 떨어진 외곽에 있는 마주켈리 뮤지엄은 일반 교통을 이용해서는 도착하기 어려운 곳이라 그런지 전시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잔니 베르사체가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위해 제작한 알록달록하고 기하학적인 무늬의 발레 의상이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았다. 그 옆에 서있는, 마치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것 같은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발레복은 마치 춤을 권하는 듯하다. 그 순간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벨칸토의 대명사인 파바로티의 음성이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83년 밀라노 스칼라좌에서 막이 오른 도니체티의 ‘람메르무르의 루치아’에서 파바로티가 입었던 미쏘니 의상이 있었다. 벽에 붙은 화면에서는 같은 옷을 입은 파바로티가 노래를 하고 있었다.

9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축구 오프닝을 위해 미쏘니가 만든 의상 
 
칼 라거펠트가 80년대 펜디에서 밍크를 사용해 만든 베르디·푸치니·모차르트·비제 오페라 무대의상도 있었다.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대회 개막식 퍼포먼스에 사용된 미쏘니의 아프리카 의상들도 보였다. 지그재그 등 아프리카 전통 의상의 상징적 줄무늬를 모티브로 한 미쏘니의 니트는 돋보였다. 갯민숭달팽이를 연상시키는 러플(ruffle)이 달린 로베르토 카푸치의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의상들, 2008년 밀라노 피콜로 극장에서 상연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위해 안토니오 마라스가 디자인한 의상도 독특했다.

모차르트의 장난기와 천재성은 로메오 질리의 의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95년 파르마의 레지오 극장에서 상연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위해 제작된 의상들은 새의 깃털, 혹은 화려한 색상의 그물처럼 짠 실을 사용해 만들어졌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해도 마지막 방에 마련된 잔니 베르사체의 의상들이다. 그의 천재성은 패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전시된 몇 개의 의상만 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잔니 베르사체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무대”라 했을 만큼 무대와 공연을 사랑했다. 베르사체 하우스에는 손을 뗄 날이 없을 정도로 많은 주문이 들어왔다고 한다. 베르사체의 특징인 바로크적인 취향이 가미된 의상들은 감독들의 사랑을 받았다. 덕분에 모리스 베자르, 밥 윌슨, 롤랑 프티, 윌리엄 포사이드 등과 협동 작업할 수 있었다. 82년 밀라노 스칼라좌에서 열린 리하르트 스트라우스의 ‘요셉의 전설’, 84년 공연된 도니체티의 ‘돈 파스콸레’, 87년에 공연된 스트라우스의 ‘살로메’ 등에 사용된 환상적인 무대의상들도 볼 수 있다.

이번 전시회의 또 다른 장점이라면 20년, 30년 전에 공연되었던 작품들을 DVD를 통해 섹션마다 보여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스타일리스트들이 의상 디자인을 위해 그린 오리지널 스케치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타일리스트의 디자인들은 자세하고 정확한 디테일보다 수채화나 파스텔·아크릴·연필 등을 이용해 머릿속에서 그렸던 의상의 전체적인 느낌을 강조했다. 그런 이미지와 실제 의상을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진진했다.

전시장은 지난 30년간 상연된 모든 공연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또 다른 공연을 하고 있는 ‘무대’였다. 의상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이어주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열렸던 오페라나 창극, 마당놀이에 사용되었던 의상은 누가 디자인했을까. 그 의상들도 30년 후에 다른 목소리나 다른 영혼의 힘으로 되살아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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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희씨는 밀라노를 무대로 활약 중인 보석디자이너다. 유럽을 돌며 각종 공연과 전시를 보는 게 취미이자 특기. 『더 주얼』(2009) 등을 썼다.

김성희 유럽통신원 sunghee@stella-b.com 사진 움베르토 알레만디출판사 제공
중앙선데이 | 제203호 | 20110130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