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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패션

럭셔리 브랜드 이야기 [5] 버버리

수류탄·쌍안경 휴대 쉽게 만든 코트, 1차대전 터진 뒤 대박났죠
 

영화 ‘애수’를 기억하시나요. 남자 주인공인 로버트 테일러는 워털루 다리 위에서 트렌치 코트를 입고 과거를 회상합니다. 영화 ‘카사블랑카’는 어떻고요.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는 트렌치 코트의 깃을 세운 채 우수 어린 연기를 보여주죠. 두 장면이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분위기 있는 남자’ 하면 어김없이 트렌치 코트가 등장하곤 했습니다. 한데 이 ‘트렌치 코트’를 ‘버버리’로 부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워낙 유일무이한 디자인이다 보니 브랜드 자체가 하나의 아이템을 대표하게 된 거죠. 옷만큼이나 친숙한 이름, 버버리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이도은 기자

포목점 운영 버버리, 방수 옷감 ‘개버딘’ 개발

“영국이 낳은 것은 의회 민주주의와 스카치 위스키, 그리고 버버리 코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버버리는 그 자체가 영국의 상징이다. 브랜드에 대한 영국인들의 애정도 각별해서 2007년 영국 웨일스에 있는 버버리 공장을 중국으로 옮긴다는 소식에 영국 노동상 소속 의원들이 “버버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라”고 쓴 대형 카드를 버버리 본사에 보냈을 정도였다.

‘버버리 제국’을 만든 건 토머스 버버리(1835~1926·사진)다. 이미 스무 살 때 런던에서 포목상을 운영했던 그는 당시 농부나 목동들이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덧입었던 리넨 옷을 보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비가 와도 잘 스며들지 않고 바람이 잘 통하는 옷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노력 끝에 1888년 결실을 얻었다. 미리 방수 처리한 면사로 짠 뒤 다시 한번 방수가공 처리한 ‘개버딘(Gabardine)’이라는 옷감을 개발해낸 것. ‘순례자가 입는 겉옷’을 뜻하는 스페인어 ‘카발디나’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개버딘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할 뿐 아니라 구겨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비가 시도 때도 없이 내리고 항상 축축한 영국 기후에 안성맞춤이었다. ‘거친 환경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하는 옷’이라는 버버리의 패션철학과도 맞아떨어졌다. 그는 이 원단으로 만든 레인코트를 선보이면서 런던 헤이마켓에 매장을 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버버리로서는 전환점이었다. 1914년 전쟁사령부는 전투용 코트를 버버리에 의뢰했다. 50만 명의 연합군 장교들에게 개버딘 코트를 입힐 목적이었다. 현재 버버리 트렌치 코트의 디자인이 그때 탄생했다. 수류탄과 지도, 탄약통이 든 가방을 갖고 다닐 수 있도록 D형 고리가 생겨났고, 쌍안경과 가스 마스크를 고정시키기 위해 어깨 견장도 추가됐다. 오른쪽 가슴에 덧단을 댄 것은 장총을 쓰다가 개머리판이 닿아 원단이 마모되는 것을 줄이려는 목적이었다. ‘트렌치(trench)’라는 말 자체가 군인들이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참호를 뜻했다. 말을 탄 기사를 형상화한 버버리 로고도 그때 트레이드 마크로 등록됐다. 버버리 하면 생각나는 특유의 체크무늬 역시 1924년 트렌치 코트의 안감용으로 개발된 디자인이었다.

왕실이 보증한 품질 … 코난 도일, 처칠도 반해

◀로버트 테일러가 입고 나와 버버리의 트렌치 코트를 세계적으로 유행시켰던 영화 ‘애수’의 한 장면.

버버리의 명성을 만든 건 영국 왕실이었다.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대표적이었다. 그가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됐다. 버버리는 1919년 조지 5세 때 영국 왕실의 재킷·코트 등을 만들어 정식 납품하기 시작했고, 50년에는 조지 6세의 방한복을 제작하기도 했다. 드디어 55년과 89년엔 영국 왕실(엘리자베스2세)과 웨일스 왕실(웰스 황태자)로부터 각각 로열 워런티(royal warranty)를 수여받았다. 로열 워런티는 영국 등 유럽의 왕실들이 최고 장인에게 수여해온 일종의 품질 보증서다.

세계 저명인사들도 버버리의 애호가였다. 작가 코난 도일, 윈스턴 처칠 영국 전 총리,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 등이 고객 리스트에 올랐다. 특히 처칠의 사진에선 버버리의 트렌치 코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 종종 발견됐다. ‘재키 스타일’이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패션에 큰 영향을 미친 미국의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는 화려한 패션을 추구하면서도 여행 땐 편안한 착용감의 버버리 코트를 즐겨 입었다. 이처럼 영국 왕실 식구들과 유명인들이 애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버버리의 귀족적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버버리는 비행기 조종사와 선장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은 브랜드였다. 가벼우면서도 외풍을 막아주는 기능성 때문이었다. 1911년 남극 탐험을 최초로 성공시킨 아문센도 버버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동료 탐험가인 스콧 선장에게 탐험 성공을 알리기 위해 개버딘 텐트를 남극에 남겨두기도 했다. 또 1919년 최초의 대서양 횡단자인 알콕 경은 버버리 슈트를 입고 비행에 성공했다.

이런 ‘버버리와 탐험’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2009년 가을·겨울 컬렉션에서 ‘에비에이터(비행가)’를 컨셉트로 잡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현대적 체크무늬 선보이며 1990년대 위기 돌파

하지만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버버리도 위기를 맞았다. 왕실로부터 6번에 걸쳐 수출상을 받은 이력이 무색해졌다. 체크무늬와 트렌치 코트만을 고집한 것이 매출 부진의 원인이었다. 디자인은 늘 같고, 아이템은 한정적인 버버리에 소비자들은 식상했다. 브랜드 자체를 노인들이나 입는 옷이라며 외면했다. 너무 많은 소규모 상점들에 판매를 허용하면서 고급 백화점인 해러즈에서는 버버리를 취급하지 않는 일도 생겨났다. 루이뷔통과 구찌 등 다른 명품 브랜드들이 낡은 이미지를 벗어던지기 위해 끊임없이 신제품을 만들고, 매장 인테리어를 바꾸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던 것과 달랐다.

브랜드는 혁신을 모색했다. 1997년 당시 미국 삭스백화점 회장이었던 로즈 마리 브라보를 최고경영자(CEO)로 끌어들였다. 새로운 경영시스템을 도입해 해외로 공장 이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무엇보다 버버리의 오랜 틀을 깨는 디자인을 연구했다. 이를 위해 질 샌더의 선임디자이너였던 로베르토 메니체티를 기용,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자리에 앉혔다. 그는 일단 1999년과 2000년 연달아 ‘버버리 프로섬 컬렉션’이란 새로운 라인을 선보였다. ‘프로섬’은 라틴어로 ‘전진’의 뜻. 전통에 갇히지 않고 한 발 나가겠다는 도전을 담은 것이었다. 쇼에선 전통 체크무늬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의 체크무늬를 잇따라 등장시켰다. 펑크적이고 젊음이 느껴지는 ‘노바체크(사진)’, 클래식하면서도 세련된 ‘토널 체크’ 등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를 계기로 젊은 패션피플들을 다시 버버리 매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젊은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베일리가 바꾼 것

2001년 버버리는 또 한번 젊은 브랜드로의 이미지 변신을 꾀했다. 서른 살 젊은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베일리(사진)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영입했다. 베일리는 구찌와 도나 카란의 수석 디자이너였다. 영국 런던의 유명 디자인 스쿨인 RCA(Royal College of Art) 재학 시절 도나 카란에 의해 발탁됐고, 톰포드와 구찌 기성복 라인을 전개하는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버버리 프로섬을 본격적으로 대중 앞에 내놓으며 ‘새롭고 젊은 버버리’를 만들어냈다. 이와 함께 다른 컬렉션 라인 및 광고, 디스플레이 등 버버리의 모든 분야를 총괄했다. 지난해엔 아예 크리에이티브 총괄 책임자(Chief Creative Officer)로 승진해 라이선스 제품 등을 포함한 모든 버버리 컬렉션을 관장하고 있다. 이는 모든 광고 캠페인, 아트 디렉션과 건물 및 스토어 디자인, 멀티미디어 컨텐트 등을 포함한 회사의 이미지까지 그의 손에 달렸다는 의미다.

◀2010 봄·여름 버버리 프로섬 컬렉션에서 선보였던 트렌치 코트.

브랜드의 변신을 꾀하면서도 지난 10년간 그가 고집하는 것은 단 하나, 전통에 대한 가치였다. “버버리의 방향은 브랜드가 가지고 있는 오랜 유산과 전통을 간직하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라는 말로 이를 대변했다. 실제 베일리는 4계절 내내 빠지지 않고 트렌치 코트 ·재킷 등을 선보였다. 하지만 정형화된 더블 브레스트의 트렌치 코트가 아닌 소재의 다양성을 추구했다. 면·개버딘·오간자·실크·린넨 등이 계절에 맞게 이용됐다. 또 그는 버버리의 트렌치 코트를 최대한의 여성미를 살린 의상으로 탈바꿈시켰다. 갖가지 벨트로 허리라인을 잡아주거나, 소매 부분을 슬림하게 만들어 길어 보이는 효과를 만들었다. ‘젊은 버버리’를 향한 그의 전략이 서서히 통하면서 지난해 전 세계 매출은 전년 대비 8~37%까지 늘어났다.

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 활용, 디지털에 눈뜨다

지난 3년간 버버리 앞에는 ‘디지털’ 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를 이용해 고객들에게 브랜드의 최신 정보를 수시로 전하는 것은 기본. 컬렉션 등의 주요 행사를 디지털화시켜 누구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모든 시도는 명품 패션 브랜드 중 유일했고 또 최초였다. 영국 런던에서 열린 2010 봄·여름 여성복 쇼가 시발점이었다. ‘라이브 버버리(live.burberry.com)’에선 이 컬렉션을 전 세계로 생중계했다. 접속한 누구나 실시간으로 쇼를 감상하고 의견을 올릴 수도 있었다. 이후 버버리의 모든 쇼는 생중계가 가능해졌다. 2010년 가을·겨울 여성복 패션쇼에서 시도한 3D(3차원) 생중계도 새로운 시도로 화제를 불렀다. 런던·두바이·파리·도쿄·뉴욕 등 도시에서 열려 현장만큼 생생한 패션쇼 관람을 가능케 했다. 이런 컬렉션 중계는 바로 판매와 연결되기도 했다. 버버리는 ‘런웨이 투 리얼리티(Runway to Reality)’라는 시스템을 개발, 다음 시즌의 패션쇼가 끝남과 동시에 웹을 통해 고객이 제품을 직접 주문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

이외에도 아트 오브 더 트렌치(Artofthetrench.com)라는 소셜 네트워크 사이트를 따로 만들어 버버리의 트렌치 코트를 기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용자들이 직접 본인이 입은 트렌치 코트의 사진을 올릴 수 있도록 설계됐다. 또 다양한 아티스트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새로운 트렌치 코트를 선보인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중앙일보] 입력 2010.12.08 00:04 / 수정 2010.12.08 1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