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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패션

멋을 아는 남자 패션으로 말한다

[커버스토리]멋을 아는 남자 패션으로 말한다 
“침체됐던 남성복 시장 다시 기지개” 

■ ‘2011 밀라노 남성 패션위크’ 가보니

‘남자라서 행복해요.’ 15∼18일(현지 시간) ‘2011년 밀라노 남성 패션위크’에서는 짧은 재킷, 모피 장식, 컬러의 향연으로 대변되는 ‘이탈리아 신사’ 패션이 다채롭게 펼쳐졌다. 위에서부터 로베르토 카발리, 돌체앤가바나, 엠포리오 아르마니, 돌체앤가바나, 살바토레 페라가모. 사진 제공 각 회사, EPA 연합뉴스 

#1. 이탈리아 신사

다시 태어난다면 이탈리아 남자로 살아봤으면 좋겠다.

어깨 패드를 없앤 입체 패턴 재킷의 자연스러운 멋을 아는 이탈리아 신사 말이다.

그 멋쟁이 신사는 로마의 ‘브리오니’니, 나폴리의 ‘키톤’이니 하는 이탈리아 정통 클래식 정장들의 미세한 차이를 직감으로 안다. ‘보르살리노’ 중절모도 멋들어지게 소화한다.

체크무늬 재킷에 빨간 바지를 입어도, 넥타이 대신 스카프나 퍼 머플러를 둘러도, 모직 코트 대신 요즘 유행하는 패딩 점퍼를 입어도 경박하기는커녕 유머가 있다. 그건 순전히 장(醬) 맛처럼 오래 묵은 패션의 내공 덕이다.

치마든 바지든, 하이힐이든 단화든 선택의 폭이 큰 여자에 비해 남자의 클래식 패션엔 어느 정도 룰이 있다. 이탈리아 신사는 그 룰 안에서 최적의 아름다움을 찾는다. 그 행복한 수고로움도 부럽다. 그래, 이탈리아 신사를 만나러 가자. 
 
#2. 밀라노에선 밀라노 법(法)

15∼18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밀라노행은 이탈리아 신사를 여럿 만날 수 있는 찬스였다. 올해 가을 겨울 트렌드를 내다보는 쇼인 ‘2011년 밀라노 남성 패션위크’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남자뿐 아니라 각국에서 이 쇼를 취재하기 위해 몰려든 포토그래퍼와 패션 담당 기자, 바이어들의 패션도 늘 그렇듯 볼거리였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다. 프랑스 파리에선 온통 검은색으로 빼입던 패션계의 남자들이 밀라노에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클래식 정장을 꺼내 입는다. 바지폭은 좁다. 이탈리아 신사 행세인 셈이다. 하긴 옷을 잘 입는 건 골프 스윙처럼 끝없는 모방과 연습이 이뤄내는 정직한 결과물이다.

신사는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고수(高手)가 서로를 알아보듯, 신사도 그렇다. 패션위크 기간 파파라치 사진의 주인공 중엔 카메라 플래시를 작정하고 노린 ‘워너비(Wannabe) 신사’도 있을 수 있다. 예전엔 한두 달 후쯤 잡지에 소개되던 이 사진들은 이제 인터넷과 페이스북에 실시간으로 오른다. 패션 잡지에는 길거리 사진인데도 자주 얼굴이 보이는 남자들이 있다. “부온 조르노, 아저씨! 지난번 바지는 초록색이더니 이번엔 오렌지색이네요.”

#3. 차이나 파워

떠오르는 ‘차이나 파워’는 패션 분야에서도 실감할 수 있다. 일단 중국 기자와 바이어들이 부쩍 많아졌다. 이들의 차림새도 갈수록 세련돼진다. 양과 질에서 패션 진도가 빠르다. 
 
패션위크는 하루에 10여 개의 쇼가 장소를 바꿔가며 열린다. 쇼에 따라 옷을 바꿔 입고 나타나는 부지런한 동양인 남자가 눈에 띄었다. ‘돌체앤가바나’ 쇼에선 이 브랜드를 상징하는 호피 무늬 셔츠를 입고 왔다. 호기심이 생겨 그에게 “어디서 왔습니까?”라고 물었다. “‘레옹(LEON)’요.” “중국에서 왔나요?” “네. 베이징.”

레옹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이탈리아 신사 패션을 추구하는 남자들이 즐겨 보는 일본의 남성 패션 잡지다. ‘레옹 베이징’에서 왔다는 그는 “중국 남자들이 브랜드를 빠르게 알아간다”며 “클래식 패션의 수요가 생긴 한국에도 레옹이 곧 발간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차이나 파워의 압권은 15일 이탈리아 남성복의 자랑인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쇼였다. ‘인 더 무드 포 차이나’란 제목이 힌트를 주듯 이 쇼는 제냐의 중국 진출 20주년을 기념해 중국에 헌정하는 성격이었다. 지난해 상하이 엑스포 중국관에 전시됐던 중국 아티스트 장쩌돤 씨의 족자 형태 회화가 쇼 내내 무대 화면에 흘렀다. 중국 도시와 시골의 풍경과 일상을 그린 그림이다. 할리우드 3D 영화 ‘아바타’의 비주얼 컨설턴트였던 제임스 리마 씨는 이 그림과 쇼에 첨단 테크놀로지를 접목해 ‘라이브-D 패션쇼’라는 이색 장르를 열었다. 배우 현빈을 닮은 중국 남자 모델들이 입었던 차이나 칼라의 옷들은 실크와 가죽에 중국 앤티크 문양을 더했다. 중국 색채가 워낙 강해 ‘과연 이 옷이 이탈리아의 제냐, 맞나’ 싶었다. 그래, 구애(중국을 향한 제냐의 구애)는 이왕 할 거면 그렇게 화끈하게 하는 거다.

#4. ‘몽클레르’의 놀라운 인기

밀라노의 쇼핑 중심가 거리인 ‘비아 델라 스피가’에는 2008년 오픈 이후 늘 손님이 줄을 서 입장을 기다리는 패션 상점이 있다. 럭셔리 패딩의 대명사인 ‘몽클레르’다. 밀라노 시민뿐 아니라 관광객까지 이 ‘꿈의 패딩’을 얻기 위해 좁은 골목길에서 기꺼이 줄을 선다.

1930년대 프랑스에서 출발한 몽클레르는 하이테크 기술력으로 패딩을 날씬하게 만들었다. 패딩 재킷 한 벌 가격이 100만 원∼수백만 원대. 몽클레르는 ‘싸고 뚱뚱한 옷’이었던 패딩의 지위를 ‘도시에서 입는 스타일리시한 옷’으로 격상시켰다. 2003년 이탈리아 기업가 레모 루피니 씨가 사들여 파리가 아닌 밀라노에서 패션쇼를 한다. 
 
2009년엔 미국 디자이너 톰 브라운 씨를 영입해 고감도 남성 컬렉션 라인인 ‘몽클레르 감 블루’란 라인도 론칭했다. 톰 브라운이 누구던가. 이 시대 남성 패션의 모던 클래식을 주도하는 트렌드 리더 디자이너다. 이때부터 이탈리아 신사들이 너도나도 재킷 위에 모직코트 대신 패딩 코트를 걸치게 됐다.

16일 진행된 밀라노 남성 패션위크에서 ‘몽클레르 감 블루’는 사냥과 승마에서 영감을 얻어 패딩을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재단했다. 모직과 회색의 조합이 한층 고급스럽다. 남자들이여, 패딩에 눈을 돌려보자. 이 세상엔 미쉐린 타이어 모양의 패딩만 있는 게 아니다. 이날도 비아 델라 스피가의 몽클레르 매장은 입장 대기시간이 평균 30분이었다.

#5. 이탈리아 패션계의 ‘빅 네임’

‘아르마니’와 ‘페라가모’는 이탈리아 패션의 자존심이다. 고로 두 브랜드의 움직임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노장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 씨는 16일 ‘엠포리오 아르마니’ 쇼를 시작하면서 ‘EA 7 골프’란 신규 라인을 가장 먼저 무대에 올렸다. 신고식을 치른 이 골프 라인은 곧 제품화될 예정이다. 아르마니 씨는 “쿠튀르(고급 디자이너 제품)에 컨템포러리 에지를 불어넣었다”며 “나일론과 퀼팅은 이제 안녕”이라고 했다. 그 대신 그는 캐멀색, 회색의 모직과 니트를 활용해 ‘고급스러운 스포츠 감성의 도시 남자’를 구현해 냈다.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쇼를 보면서는 ‘지난해 불어닥쳤던 무스탕의 인기가 한동안 지속되겠군’이란 생각을 했다. 청록색과 와인색을 진득하게 풀어낸 정장은 감탄할 만했다.

모델들의 캣 워크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디자이너가 나와 인사를 한다. 페라가모의 마시밀리아노 조네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무대 중간쯤까지 걸어 나가 누군가에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그곳엔 페라가모 오너 가문에서 패션 부문을 지휘하는 제임스 페라가모 씨가 앉아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두 시간 전 조르조 아르마니 씨는 라운드넥 티셔츠를 입고 무대로 나와 남자 모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들이 세계 패션계를 움직인다.

#6. 다시 이탈리아 신사

밀라노 남성 패션위크 기간 한국의 유통, 패션회사 관계자들이 대거 밀라노에 출동했다. 대개는 이 행사 직전 피렌체에서 열린 남성복 전문 박람회인 ‘피티 우오모’를 들렀다가 왔다. 남훈 제일모직 팀장은 “금융위기 이후 침체됐던 남성 클래식 시장이 살아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우희원 갤러리아 백화점 팀장은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에르메스’까지 다 소비해본 사람이 결국엔 옷의 소재와 기원을 공부해 가며 패션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했다.

이태리타월이 어디 이탈리아에만 있나. 당신도 옷의 가치를 즐긴다면 이탈리아 신사다.

밀라노=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동아일보 | 2011-01-21 03:00  2011-01-21 0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