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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4〉 장인과 예술가

예술 vs 실용… 서로의 영역 존중하며 상부상조

오래전 말 안장을 만들던 장인이 있었다. 안장 만드는 기술이 무척이나 뛰어났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몇 세기에 걸쳐 만들어져오던 전형적인 안장이 아닌 ‘현대적’인 형태의 안장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침 도시에서는 분리파 운동이 한참 벌어지고 있었는데 이 운동이 ‘현대적’이며, 개성 넘치는 예술적인 수공업을 주창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 장인은 자신의 안장 중 제일 잘 만들어진 것으로 골라 들고 운동을 앞장서 이끌던 대학 교수를 찾아간다. “교수님, 이 운동이 추구하는 바는 소문으로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인인데, 현대적으로 세련된 작업을 하고 싶어요. 교수님 보시기에 이 안장은 어떤가요?”
 

◇‘DING DONG BAT’(이사무 노구치, 1968년. 사진: J 뮬렌도르프).

교수는 장인의 안장에는 상상력이 부족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아! 상상력!” 그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했던 거다. 교수의 설명을 들은 장인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그는 안장을 만드는 데 상상력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교수는 고민에 빠진 장인을 흔쾌히 도와주겠다며 자신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개념에 잘 맞는 안장 도안을 여러 점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걱정하지 말고 내일 다시 찾아오십시오. 우리가 그래서 여기에 모여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음날 그는 학생들이 그린 44점과 교수가 손수 디자인한 5점의 ‘독특한 분위기’의 안장 도안을 보게 되었다. 침착하게 새로운 안장 도안을 살펴본 장인이 말했다. “교수님, 제가 말을 타는 법을 몰랐거나 안장용 가죽의 속성이나 그것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별다른 지식이 없었다면, 저도 비슷한 상상을 했을 겁니다.”

이 이야기는 19세기 말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던 건축가 아돌프 로스가 당시 크게 성행하던 장식적인 양식을 띤 미술운동인 분리파에 반대하는 활동을 펴며 창간한 잡지 ‘다스 안데레’(‘다른 것’이란 뜻)에 실었던 내용이다. 로스는 ‘장식은 범죄’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써가며 장식이 제거된 합리적인 건축물이야말로 높은 수준의 문명을 나타낼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예술가와 건축가들에게 “안락한 공부를 집어치우고”, “나무틀, 도자물레, 가마, 목공작업대를 붙잡고 일을 시작하라”고 외쳤다. 그는 “이론적이고 무미건조한 예술은 버려야 할 엘리트의 장난”과 같은 것이며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생활과 습관, 편리함과 유용함으로부터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말 안장을 만드는 장인의 이야기는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를 따질 때나, 디자인 상품이 가져야 하는 실용성과 예술성의 정도에 대해 논쟁할 때마다 종종 인용되곤 한다. 하지만 의외로 논쟁의 당사자격인 예술가와 장인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범주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도 않으며 상부상조하며 잘 지내왔다. 아직까지도 종종 이탈리아의 조각가들 사이에 재료를 다루는 솜씨와 기교는 뛰어나지만 예술성은 떨어지는 작가에게 “아르티자노(장인) 같으니…”라는 표현을 쓰긴 하지만, 그건 작가의 예술성이나 인격을 폄하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그 좋은 실력으로 장인을 하지 왜 소질이 없는 작가를 하려고 하냐는 애정 어린 안쓰러움의 표현일 수도 있다.

◇피에트라산타 보제티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들(사진:C 시그마).

르네상스시대의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토스카나 북부의 도시 까라라 산 대리석으로 다비드 상을 만들었다. 까라라와 그 근교에 있는 피에트라산타에는 대리석을 가공하고 청동을 주조하는 산업이 크게 발달해 왔는데 20세기 중반까지 엄청난 양의 종교조각과 묘지조각이 이 지역에서 집중 생산되며 성황을 이뤘다. 지금은 관광객이 대부분이지만 당시엔 거주민 대부분이 석공이거나 청동공장에서 일하는 장인들이었다고 할 정도로 장인의 수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조각 작업장에 남아 있는 장인들은 종종 “작업장에 찾아와 기술을 배우겠다고 설쳐대는 요즘 대학생들이 많은데 말이야,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오면 이미 늦어”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서 혀끝을 차곤 한다.

어릴 적부터 갈고 닦은 솜씨와 고난도의 기술이 몸에 자연스럽게 배인 음악이나 스포츠 영재들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예상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하지만 뛰어난 장인으로 키우겠다고 정과 망치를 쥐어주며 학교 수업에서 아이를 빼내는 부모가 있다면 아동 학대로 몰리기 십상일 만큼 이젠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얘기다. 지금은 노인이 된 이 장인들은 당시에 20여㎞ 떨어진 대도시에 걸어서 다녀오곤 했고, 행여 신발이 상할까봐 맨발로 걸어다녔던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들에겐 공방이 학교였고, 스승이 직업훈련부터 인성교육까지 겸했다. 그중 뛰어난 솜씨를 보이거나 독특한 감수성을 제작물에 불어넣는 이는 남의 작품을 의뢰받아 만들지 않고 본인의 작품을 만들며 작가로 등용하기도 했지만 흔히 있는 경우는 아니었다. 제각각 큰 형태만을 깎아내는 장인, 대리석판에 글자나 꽃을 주로 새기는 장인, 옷자락 묘사를 전문으로 하는 장인 등 작업이 세분화되어 있었다.

작품의 크기가 커질수록 작가들은 장인들에게 기술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새롭고 실험적인 것을 포기할 수 없는 예술가와 그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술전문가인 장인 사이에는 의견 충동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현재 미국 LA뮤직센터에 야외 설치된 자크 립시츠의 조각품은 1960년대 중반 피에트라산타의 톰마시 주조공장에서 제작되었다. 작품 제작을 위해 작업장을 찾은 그는 손바닥 길이를 조금 넘을 법한 모형조각을 꺼내놓았는데 그가 의뢰한 최종 완성될 조각의 높이는 29피트(약 9m)였다. 작가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으로 완성해줄 것을 약속하며 공장에서 가장 점토모델링 솜씨가 좋은 장인이 불려왔다. 마른 체구, 먼지를 머리카락에 잔뜩 덮어쓴 모습이지만 비교적 젊은 나이의 그는 이름이 레시오라고 했다. 그는 작업장 안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마을에 지나다니거나 바에 음료를 마시러 갈 때에도 늘 엄지와 검지 사이에 점토 새알을 굴리고 다녔다. 그가 큰 볼륨을 잡은 후 세부 묘사를 할 때 한 점씩 떼어 붙이는 만큼의 양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비사교적인 성격의 그를 잘 씻지도 않는다거나, 점토 새알을 자면서도 굴릴 거라고 놀려댔지만 말수가 없었던 그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래전부터 장인들은 표시점과 거리를 재어서 옮기는 컴퍼스 계산법을 써왔고 그 기술을 이용해 조각의 크기를 비율 눈금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게 옮겨내곤 했지만, 립시츠가 의뢰한 작품처럼 모델에서 완성품까지 높이만 해도 수십배가 넘게 확대해야 할 작품의 정확도는 결국 장인의 능력에 달렸다고 볼 수밖엔 없었다.

◇‘땅 위의 평화’(자크 립시츠, 1966∼69년. 사진: L 뉴턴).

몇 주에 걸쳐 수백㎏의 흙덩이를 버티기 위한 기본 철골 골격 구조가 지어졌고 레시오가 다시 몇 주에 걸쳐 말 없이 긴 사다리를 걸쳐 놓고 흙을 붙여 올라갔다. 요즘엔 합성수지 폼을 CNC기계로 깎아 바로 청동으로 떠내기도 하지만 1960년대 중반이었던 당시엔 이 정도 크기의 청동 작품을 만들어 내는 데에는 몇 달씩 시간이 걸리곤 했다. 사실 자크 립시츠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피렌체의 조각 작업장에서 동일한 작품을 만들어 석고 캐스팅까지 완성했었는데 청동작업을 위해 준비하던 중 아르노강이 범람해 일어난 홍수에 작품을 잃었다. 100여명이 목숨을 잃고 우피치 박물관의 예술품들이 상당수 파괴되었던 1966년 11월4일의 대홍수는 역사적으로 기록된 큰 사건이었다. 7개월에 걸쳐 한 작업이 수포로 돌아간 후 작품을 모델링부터 다시 시작하기 위해 찾은 곳이 피에트라산타였으니 립시츠는 신경이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져 있었고 상당히 지친 데다 작품을 기일 내에 마감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을 것이다.

큰 형태가 잡히고 모델링 작업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세부 묘사에 들어갔을 즈음 맘이 조급했던 립시츠는 사다리 아래에서 이쪽, 저쪽 세부부위를 가리켜 수정을 요구하며 사다리 위에서 작업하고 있던 레시오에게 주문을 해댔다. 처음에는 잠자코 그가 원하는 대로 흙을 옮겨 붙여주었지만 인근 지역에서는 가장 손이 빠르고 정확하다는 평을 받던 장인으로 손꼽히던 그였던지라 신경이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일을 하다 갑자기 작업하던 손을 멈추고 사다리 밑으로 내려온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조각 모델을 한 손으로 덥석 잡아 립시츠에게 떠넘기듯 안겨주며 그렇게 잘할 것 같으면 작가가 모형부터 제대로 만들어 오시라는 말을 퉁명스럽게 이탈리아어로 내뱉고는 집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물론 장인의 입장에서는 작가가 빚어놓은 작은 모델에서 몇 m씩 크게 대형 작품으로 뽑아 놓는 게 자신의 손에 달려 있으니 명예와 부를 누리고 있던 작가들에게 공로를 빼앗겼다거나, 자신들의 능력이 비교적 저평가된다는 생각도 없잖아 있었겠지만 사실 대부분은 재료의 특성이나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 예술가가 자신의 제작 방법에 이의를 달거나 훈수하는 걸 귀찮아하거나 기술이 손에 익지 않은 사람들이 순진하게 실험하며 시간을 끄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뿐이다.

레시오가 작은 모형을 생긴 그대로 똑같이 확대 복제해낼 자신의 능력에 확신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립시츠의 작가적인 능력에 의심을 품고 그 말을 던지진 않았다. 본인은 시키는 대로 정확하게 잘해낼 자신이 있으니 작업 시간을 단축하려면 최종 결과물에 좀 더 가까운 모형을 줘야지 묘사가 덜 된 모형대로 따라 만들게 하고, 중간에 자꾸 수정을 요구하면 작업 흐름이 끊기게 된다는 표현에서 나온 걸로 보인다.

결국엔 기한 안에 그 작품의 제작을 완료해줄 다른 장인을 찾을 수 없었던 립시츠가 그에게 사과를 했고, 몇 달씩 작업장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의뢰한 사람을 화나게 했다가 다시는 작업장에 발을 붙이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던 레시오가 순순히 그의 작품을 완성하러 돌아오면서 사건은 쉽게 해결이 되었다. 립시츠의 대표 작품 ‘땅 위의 평화’는 50여개의 몰드 작업을 거쳐 청동조각으로 완성되어 1969년 5월 LA뮤직센터에 세워지게 되었다.

헨리무어, 이사무 노구치, 마리노 마리니, 만추, 보테로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이탈리아 작가와 외국 작가들이 까라라와 피에트라산타에서 작업을 했고 현재도 하고 있다. 그들이 떠난 후 남은 석고나 테라코타로 된 축소 모형의 상당량은 사실 오랜 기간 동안 작업장 구석이나 야외에 버려져 있었고 다수 소실되거나 훼손되기도 했는데 헨리 무어의 석고본은 안타깝게도 그렇게 사라졌다. 에스키스나 스케치에 해당하는 소형 조각이나 축소 모형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보제티(bozzetti)’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1984년에 비로소 피에트라산타에 만들어졌고 그동안 방치되어 있던 작가의 습작, 청동 작품의 원본이었던 석고 모형들이 한자리에 모여 빛을 보게 되었다. 박물관에 소장된 500여점의 보제티는 이곳을 지나간 300여명의 예술가와 그들을 도운 장인의 땀과 노력을 고스란히 담고 전시되어 있다.

밀라노=조각·미술설치가 hojin00@gmail.com

입력 2011.01.11 (화)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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