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esign Trend/기타

[디자인이 기술이다] 해외 디자인_청각·후각·서비스 분야까지 디자인 경쟁

'고구마 세탁기'라고 들어본 적 있는가. 이 세탁기는 일반 세탁기에 비해 배수관이 넓고 필터 구멍이 크다. 고구마를 씻고 난 후 진흙이나 찌꺼기가 잘 빠지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매년 10만 대씩 팔리는 제품이다. 제품의 탄생 스토리는 이렇다.

1996년 중국 쓰촨(四川)성의 한 농민이 "세탁기 배수관이 자주 막힌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집을 방문한 직원은 원인을 발견했다. 이 지역 농민은 대부분 고구마를 재배하는데, 수확한 고구마를 세탁기로 씻어내고 있었다. 진흙과 찌꺼기가 문제였다. 직원의 보고를 들은 CEO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학력 수준이 낮은 농민들에게 세탁기 사용법을 교육시켜라? 아니다. "고구마 세탁기를 만들라"였다. 크게 어렵지 않았다. 디자인만 조금 바꾸면 되니까. 4명의 연구원이 1년 연구 끝에 1998년 고구마 세탁기가 탄생했다. 고구마뿐 아니라 감자, 채소, 조개까지 씻을 수 있는 세탁기.

회사 이름은 중국의 1등 가전업체 하이얼 그룹, CEO는 장루이민(張瑞敏)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연구 대상까지 됐다는 바로 그 회사다. 올해 '뉴스위크'에서 선정한 세계 10대 혁신 기업에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과 함께 이름을 올렸다.

▲ 지난 10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애플 본사에서 스티브 잡스 최고경영자(CEO)가 노트북 '맥북에어'의 최신 모델을 공개하고 있다.

■디자인이 제품 혁신을 주도한다

과거 디자인이 제품을 보다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지금은 디자인이 제품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누드 디자인의 컴퓨터(아이맥), 패션 아이템 같은 MP3(아이팟) 등 애플 제품은 '혁명적인 디자인'으로 유명하다. 애플은 디자인을 먼저 만들고, 거기에 맞춰 기술을 개발한다. 나이키나 인텔 등은 최근 MBA보다 디자인스쿨 졸업생을 선호한다고 한다. 이에 맞춰 하버드나 런던비즈니스스쿨 등 유명 MBA도 디자인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일본의 생활용품업체 '무인양품(MUJI)'의 히트 상품 중에는 환풍기 모양의 CD플레이어가 있다. 마치 선풍기 같다. 벽에 걸 수 있고 줄을 당기면 음악이 흘러나온다. 심플한 디자인으로 벽에 걸어놓아도 손색없다. 줄을 보면 누구나 잡아당기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관찰해 만든 제품이다. 'CD플레이어는 바닥에 놓아두어야 한다'는 기존 관념도 벗어 던졌다. 이 제품의 디자이너 후카사와 나오토(深澤直人)는 삼성전자의 패션넷북 'N310'을 디자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저가 노트북으로 미국 내 PC 시장점유율 1, 2위를 다투는 델 컴퓨터. 혁신 제품도 없고, 신사업 개척도 못한 채 성장률은 점점 떨어져만 가던 2007년, 창업주 마이클 델은 사장으로 복귀한다. 불황 타개책은 '디자인'이었다. 그는 나이키의 유명 디자이너 에드 보이드를 영입한다. 이들의 야심작은 바로 '디자인 스튜디오'. 노트북 커버를 소비자가 직접 선택하는 시스템이다.

유명 화가, 장난감 디자이너, 그래픽 아티스트가 직접 디자인한 작품만 249종류다. 델 홈페이지를 열어보니, '갖고 싶다'는 느낌이 드는 디자인이 여럿 있다. 델은 "당신만의 컴퓨터를 만들어준다"며 홍보한다. 이 노트북을 사려면 85달러를 추가로 내야 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높은 인기 덕에 애초 58종류이던 커버를 249종류까지 늘렸다.

▲ 다양한 컬러를 채용한 델의 신형 노트북

파산 직전까지 몰렸던 스포츠용품업체 푸마는 1998년 패션 디자이너 질 샌더와 협업을 통해 패션 브랜드로 변신, 두 자릿수 고성장을 유지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기업간 기술 격차가 작고, 가격 경쟁이 심한 산업의 경우 디자인이 가장 강력한 차별화 수단"이라고 입을 모은다.

최근엔 눈에 보이는 제품만이 아니라 '서비스'까지 디자인한다. 미국의 유명 디자인 컨설팅업체인 아이데오(IDEO). 애플의 최초 마우스를 비롯 3000개 이상 제품을 디자인한 곳이다. 마이크로소프트, 펩시, 피앤지(P&G) 등이 주요 고객이다. 1991년 설립 초기에는 제품을 디자인했지만 최근에는 조직과 서비스, 전략 컨설팅을 한다.

아이데오의 히트작 중 하나인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잔돈을 넣어두세요(Keep the Change)' 서비스, 무려 1200만 명의 신규 고객을 유치한 프로그램이다. 고객들이 물건 값을 낼 때, 전체금액 중 달러 이하 단위를 자동 반올림하고 차액을 고객 계좌로 이체하는 것이다. 커피전문점에서 3.5달러짜리 카페라테를 사고 4달러를 내면 50센트가 자신의 예금 계좌에 저축된다. 버려지는 잔돈을 저축으로 연결하는 시스템, 이 '서비스 디자인'으로 뱅크오브아메리카는 70만 개의 당좌예금, 100만 개의 보통예금 계좌를 새로 개설했다.

▲ 소니 디지털 사진액자 'S-Frame' / 애플 아이팟 나노 6세대

■디자인 최고책임자(CDO) 전성시대

디자인을 바꿔 유통 채널까지 개척하는 경우도 있다. 소니(Sony)의 디지털 사진 액자 'S-Frame' 이야기다. 소니는 소비자들이 제품 포장재를 뜯어 이미지 데이터를 저장한 후, 다시 선물을 하기 위해 재포장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니는 제품 패키지를 그대로 선물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포장 상자 형태로 디자인했다. 상자 외부는 매끄러운 회색으로 하고, 로고는 엠보싱 처리를 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연출했다. 연말에는 푸른 봉투에 싸서 소중한 사람에게 전달하자는 캠페인까지 전개했다. 그 결과 S-Frame은 2007년 3만 대에서 2008년 23만 대를 차지, 시장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특히 이 액자는 미국에서 '선물용' 이미지를 내세워 디지털 전문점이 아니라 일반 생활용품점에서 판매된다.

디자인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애플, 나이키, 피앤지(P&G), BMW 등은 디자인 최고책임자(CDO, Chief Design Officer)를 부사장급으로 임명한다. CDO는 제품개발과 기획, 생산과 판매에도 함께 참여한다. 버진 애틀랜틱 항공의 경우 CDO가 비행기 내 인테리어, 공항 라운지, 직원 유니폼까지 관여한다. 아우디는 '듣기 편한 엔진 소리'를 위해 차종에 맞는 소리를 디자인하는 직원까지 두는 등 시각뿐 아니라 청각과 후각 디자인 경쟁도 치열하다.

하지만 과도한 디자인 집착은 실패를 낳기도 한다. 아일랜드의 자전거 디자이너 마이클 킬리언이 만든 '옆으로 달리는 자전거'처럼. 이 자전거는 핸들과 바퀴가 양옆에 달린 독특한 형태로 스노보드 같은 자전거를 표방했지만,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에 직면해 상업화에 실패했다.
 
박란희 자유기고가 rhpark48@gmail.com

입력 : 2010.12.28 16:04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