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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욕실 디자이너에게 PC 디자인 맡기는 발상 전환 필요

다시 강소기업이다 ③ 벤처를 키워라- 김용근 KIAT 원장의 벤처·중소기업 성공론

김용근 원장 
 
어디서나 첨단 기술을 강조하는 시대다. 작은 부품 하나를 팔려고 해도 원천기술·독자기술을 내세운다. 하지만 한국산업기술진흥원(KIAT)의 김용근 원장은 생각이 다르다. 그는 “최고의 기술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 기술에 의미를 부여해 소비자가 호응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반쪽짜리일 뿐”이라고 말했다.

닌텐도를 보자. 사람의 동작을 인식하는 칩은 몇 년 전에 나왔다. 마이크로소프트(MS)나 소니는 무시했다. 닌텐도가 게임기에 이 기술을 적용하면서 게임은 소파에 앉아 손가락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팔을 휘두르고 몸을 움직이며 즐기는 것으로 바뀌었다. 닌텐도 같은 혁신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서(outside the box)’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김 원장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아이디어와 기술이 풍부하게 흘러넘친다”며 “기업은 그것들을 활용해 어떤 차이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KIAT는 산업기술혁신을 위한 중장기 연구를 주로 하는 곳이다. 지난해 부품소재연구원·정보통신진흥원·한국산업기술평가원 등 6개 기관이 통합해 출범했다. 김 원장은 지난해부터 KIAT 초대 원장을 맡고 있다. 순천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산업자원부 산업정책본부장(차관보)과 한국산업기술재단 이사장을 거쳤다. 그가 정한 KIAT의 모토는 ‘테크놀로지는 아트다’라는 것이다.

-무슨 의미인가.
“많은 기업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과거의 기술을 더 강력한 새로운 기술로 바꾸는 데 급급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닌텐도처럼 새로운 기술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적용한 응용제품을 구상해야 한다. 이런 부분은 예술적인 감성의 영역이다. 기술은 기능적인 측면이다. 예술이 더해져야 소비자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다. 말 그대로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디자인 하면 외형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만 생각한다. 김 원장은 “디자인이란 단어는 라틴어의 ‘데지냐’에서 나왔다”고 설명했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뜻이다. 영어로는 ‘데지그네이트(지정하다)’다. 그가 “디자인은 가치를 발굴하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다.

-예술과의 융합에서 CEO의 역할은.
“스티브 잡스가 1996년 애플에 돌아갔을 때 새 PC 디자인을 조너선 아이브에게 맡겼다. 아이브는 욕실 인테리어 디자이너 출신이다. 잡스는 PC를 전자제품이 아니라 가구라고 본다면 욕실 디자이너가 집 분위기에 어울리는 제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이브가 디자인한 아이맥은 애플 부활의 신호탄이 됐다.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혁신의 눈을 갖춘 CEO 덕에 애플이 성공한 셈이다.”

김 원장은 천재에 가까운 잡스의 경우를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CEO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인터프리터(해석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업 안팎에서 다양한 얘기를 듣고 이를 종합해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KIAT가 지난해부터 테크플러스 포럼을 여는 것도 이런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특히 지난달 열린 올해 행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연계한 유일한 공개행사로 5500여 명의 관람객이 모여 세계적인 석학들의 강연을 들었다.

-중소기업이 예술과 디자인에 집중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오히려 작은 업체는 리더의 비전만 있다면 쉽게 혁신을 이룰 수 있다. 모든 기업이 공룡이 될 필요는 없다. 실제로 거미다리 모양의 레몬즙 짜는 기계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부엌용품 전문업체 알레시는 직원이 500명이다. 사내엔 전문 디자이너도 없다. 500여 명의 외부 디자이너 네트워크를 활용한다. 무게추가 달린 두 개의 철봉을 활용한 스탠드 조명으로 ‘하이테크 디자인의 정수’라는 찬사를 받은 아르테미데 역시 200명 규모다.”

-혁신의 시대에 한국 벤처기업이 생존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기업 안에서 소통의 길을 넓혀야 한다. 경영진이 제품개발 단계부터 엔지니어·디자이너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특히 한두 차례의 실패도 치명적인 중소기업은 프리프로덕션 작업이 중요하다. 영화를 만들 때도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놓고 감독이 촬영·조명 담당과 토론을 많이 하지 않나.”

-기술 분야에서 한국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동반성장 방안은.
“우리나라는 아직도 혁신을 기업 내부에서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렇다 보니 중소기업이 프로젝트 단위로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기업이 요구하는 부품을 개발해 납품하고 그 판매량에 따라 매출이 올라가는 구조가 됐다. 이런 환경에선 중소기업이 실험적인 프로젝트에 도전하기 쉽지 않다. 근본적인 혁신을 이끌어내기도 어렵다. 중소기업이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고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KIAT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진 기업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열도록 적극적으로 노력하겠다. 기업 간 교류와 협력이 이뤄지면 조만간 세계적인 성공사례가 나올 것으로 본다.”

김창우 기자 kcwsssk@joongang.co.kr | 중앙선데이 | 제198호 | 20101226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