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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패션

패션의 정석은 테일러링이다

패션의 정석은 테일러링이다
INVENTED TAILORING

디자이너들의 천재성, 이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바로 ‘테일러링’이다. 그 기본기 위에서 누가 더 ‘미친 짓’을 하고 ‘작두를 타느냐’가 마이스터의 명성을 만든다. 기본에 다시 집중하기 시작하는 시대, 과연 누가 최종 승자로 남을 것인가? 
 

  

패션의 정석은 테일러링이다

수학에는 <수학의 정석>이 있다. 영어에는 <성문기본영어>가 있고, 피아노에는 <하농>과 <바이엘>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바로 ‘기본기’를 다지기 위한 것들이라는 것. 쇼팽의 연습곡 에튀드 OP 시리즈를 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한 곡 한 곡 짚어가면서 그간에 자신이 정복해야 했던 쇼팽의 난해한 핑거링 테크닉을 설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다. 비바체, 스케르초, 알레그로를 넘나들면서 그는 덧붙였다. 그토록 난해하고 무미건조한 연습곡을 위해 건반을 두드리며 자신이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손가락에선 온통 쥐가 나고 마비돼서 손가락이 죄다 꺾일 것 같았는지, 왼손과 오른손을 따로 움직여야 할 때는 영락없이 신경증에 걸린 것 같았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손가락이 어느 순간부터 나비처럼 건반 위를 날아다니더니 연습곡 그 자체가 예술로 변모되고 결국 쇼팽의 낭만적인 감성의 뿌리에 다가갈 수 있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패션에 있어 ‘손재주’란 무엇일까? 화려한 쇼맨십도 아니고, 꿈보다 해몽이 좋은 식의 스타일링 테크닉으로 때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게 기본기다. 진짜 실력 있는 디자이너들은 아무리 쇼의 퍼포먼스가 강하고 과하더라도 옷 하나하나를 보면 웨어러블한 아이템들이 종종 발견되며, 테일러링과 봉제법 또한 매우 깔끔해 실제로 입었을 때 마치 몸을 감싸듯 편안하게 몸과 하나가 돼 떨어진다는 것이다. 작고한 고 알렉산더 맥퀸의 옷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의 천재성이 그저 화려한 쇼맨십이 아닌, 진정한 장인의 손끝에서 나온 ‘진짜 실력’이었음을 공신력 있게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도 ‘며느리도 모르고 그 누구도 모를’ 그만의 테일러링 실력 때문이었다. 무슈 디올의 실루엣을 패러디해 클래식한 하운드투스체크를 그로테스크하게 응용편으로 바꿔놓았던 맥퀸. 자신의 시그너처와 같은 신체 변형 드레스와 새 모티프 드레스를 선보이며 쿠튀르 하우스의 재단사와 봉제사들도 깜짝 놀랄 진기명기 테크닉을 선보이며, 그저 파워 숄더에 휩쓸려가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가뿐하게 눌렀던 장인. 즉 ‘창조’하는 능력이 얼마나 멋지고 경외스러운지 새삼 느끼게 해준 디자이너였다.

지난 2010 F/W 파리 컬렉션의 마지막 날이었던 3월 10일. 그가 생전에 만들었던 16벌의 의상이 그의 오랜 조력자 사라 버튼에 의해 마무리돼 프레젠테이션 형식으로 컬렉션에 섰을 때 이를 마주하던 프레스들은 깊은 탄식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유작은 철저하게 고전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결국 이 점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독창적인 기법과 온갖 ‘미친 듯’ 기발한 창작의 날개를 펼쳤던 그의 마지막 손끝 마무리는 결국 ‘고전적인 테일러링’으로의 회귀였던 것이다. 힙을 강조하는 크리놀린을 연상시키는 드레스, 우아한 중세적 가운 드레스, 로코코와 바로크 시대를 아우르는 상징적이면서 웅장한 자수…. 그저 ‘고전적’이라고 정의하기엔 좀 더 특별한 맥퀸 식의 독특한 드레이핑과 디지털 프린트 등의 현대적인 터치. 여기에 또 그의 장기인 조형적인 볼륨 메이킹이 더해졌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맥퀸이 궁극적으로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가 영원히 부재 중인 패션계. 그의 공백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정통 테일러링을 하는 쿠튀리에가 몇 손가락 안에 꼽히고 있다는 현실이고, 정통 테일러링보다 일단 눈길 확 잡아 끌고, 잘 팔릴 아이템끼리의 ‘믹스매치’ 스타일링으로 어필하는 디자이너들이 바이어들에게 사랑받는 추세라는 점이다. 그러나 지난 시즌부터 고개 들기 시작한 퓨어리즘, 90년대를 풍미했던 미니멀리즘의 부활로 기본기에 충실한 테일러링을 바탕으로 기하학적 조형미와 드레이핑을 독창적으로 펼치는 심플리스트 실루엣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두를 가능케 할 기본기인 ‘테일러링’ 문제가 첨예한 기준으로 떠올랐다.  
 

1 Givenchy 날카롭고 직선적인 테일러링으로 절제미를 살린 리카르도 티시.
2 Lanvin 궁극의 여성미를 풍성한 러플로 표현한 엘바즈.
3 Chalayan 과감한 라인, 입체적인 재단을 선보인 후세인 샬라얀.
4 Valentino 극도로 가볍고 페미닌한 테일러링을 보여준 발렌티노.
5 Alexander Mcqueen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독창적인 테일러링의 귀재 맥퀸의 유작.
6 Celine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듯 위트 있는 절개와 실루엣을 보여 분 피비 파일로.

테일러링 귀재들의 독창적인 테크닉

패션 하우스 끌로에를 떠나 그냥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유로 패션계를 은퇴했던 피비 파일로. 그녀가 셀린 2010 S/S 컬렉션으로 패션계에 귀향하면서 화두로 이끌어낸 것이 바로 ‘클래식의 회귀’였다. 피비 파일로는 트렌드보다 기능성을 추구하는 ‘인베스트먼트 피스들(Investment Pieces)’을 선보였다. 즉 시간이나 트렌드의 흐름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전혀 새로운 ‘클래식 의상’을 형상화한 것이다. 주요 아이템은 밀리터리 재킷, 펜슬 스커트, 캐시미어 케이프와 멘즈 테일러링 재킷 등…. 전체적인 실루엣은 자칫 단조롭거나 딱딱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피비 파일로는 특유의 클래식한 테일러링과 정갈한 실루엣이 실크, 새틴, 시폰 같은 소프트 패브릭과 결합됐을 때 만들어지는 여성스러움을 강조했다. 사실 테일러링의 귀재들의 실력은 여타 아이템들을 차치하고라도 화이트 셔츠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화이트 셔츠에서 디자이너의 손재주 밑천은 가장 쉽게 드러나고, 테일러링의 귀재들이 만들어내는 화이트 셔츠는 달라도 확실히 다르다. 화이트 셔츠의 기본적인 매력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대표적인 디자이너로는 아르마니와 밀란 패션 제국을 지휘하던 군주 지안프랑코 페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6월에 작고해 패션계에 충격을 던져주었지만 그는 정말 건축적이고 섬세한 쿠튀리에였다. 언제나 컬렉션에 화이트 셔츠를 빼놓지 않는 지안프랑코 페레 쇼에는 항상 다양한 변주곡으로 탄생한 화이트 셔츠들을 볼 수 있었다. 기본 테일러링에 충실하다 못해 완벽한 디자이너는 바로 질 샌더. 그리고 그녀의 뒤를 잇는 라프 시몬스도 셔츠와 컬러, 수트의 결합이 낳은 최고의 앙상블을 뽑아내기로 둘째 가라면 서럽다. 깔끔하다 못해 미니멀의 경계를 훌쩍 넘어버릴 만큼 매끈하게 테일러링된 다양한 드레스와 수트, 쇼츠 등은 이번 시즌 바이어들로부터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기본에 충실한 테일러드 피스들 외에도, 의도적으로 파괴된 의상들, 이리저리 잘라진 후 덧붙여진 리넨 소재 의상들은 이번 시즌 해체주의를 리드하는 룩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런 해체주의 기법을 보여주고 있는 라프 시몬스와는 또 다른 차별성을 지닌 테크닉을 선보이는 듀오 디자이너 로다테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뉴욕 최고의 쿠튀리에로 불리기도 하는 이들 케이트와 로라 물레비 자매는 다른 자신들만의 해체 구성 기법을 선보임으로써 차별화를 추구하고 있다. 바이어들은 로다테 듀오의 의상을 마치 본인들의 숍을 하이엔드로 끌어올려 줄 구원자처럼 생각하고 있는 듯 이들에 대한 호평을 아끼지 않고 있다. 실험적이며 풍자적인 테일러링의 선두주자 레이 카와쿠보는 또 어떤가. 그녀는 언제나 화이트 셔츠와 블랙 재킷이라는 베이식한 아이템을 재료로, 무한하게 펼쳐 보일 수 있는 테일러링의 가능성을 열어보였다. 그녀의 손끝에서 화이트 셔츠는 갈갈이 해체됐다가도 꿈처럼 결합하는 등 특유의 상상력과 위트 있는 테일러링을 선보였다. 우선 이름부터 유쾌한 듀오 디자이너 빅터 앤 롤프는 네오 바로크에 대한 향수를 유쾌하고 위트 있게 표현했는데 그들이 장난스럽고와 재미있는 이유는 ‘진지함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디자인들을 내놓는 와중에도 제법 진지한 테일러링의 테크닉을 끼워넣음으로써 완벽한 기본기를 자랑한다는 것이다.

런던 중심부의 정통 테일러링가 새빌로(Sabilow)에는 지금도 맥퀸의 후예, 스텔라 맥카트니의 후예를 꿈꾸는 패션 학도들이 ‘기브스 앤 호크스’ ‘앤더슨 앤 셰퍼드’ 같은 오랜 전통을 가진 고급 양복점에서 수제 양복 장인들의 기본기를 어깨 너머 배우기 위해 몰려들고 있다. 맥퀸은 정규 교육을 거치지 않고 16세 때부터 이곳 ‘기브스 앤 호크스’에서 테일러링을 익혔고, 스텔라 맥카트니의 수트가 아름다운 이유도 그녀가 바로 이곳 새빌로에서 견습을 거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테일러링 장인인 에드워드 섹스턴(Edward Sexton)은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밸런스”라 했다. 패턴이나 조잡한 디테일에 집착할 게 아니라 기본 테일러링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밸런스를 만들어내는 것. 그렇게 기본적인 밸런스 기술을 익혀야 언밸런스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쇼핑할 때 행거에 걸려 있는 것만 대충 보고 혹은 마네킨이 입고 있는 것만 보고 덜컥 사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들어오셔서 일단 입어보세요. 보는 거랑 입는 거랑 다르니까요”라는 숍 마스터의 이 말만큼은 “정말 잘 어울리세요”보다 확실히 백배는 더 진실성 있는 멘트임은 분명하다. 몸과 옷이 하나가 되는 완벽한 나만의 옷. 거기에는 디자이너의 ‘손맛’으로 완성된 테일러링의 마법이 감춰져 있으니 옷이 나를 얼마나 완벽하게 끌어안는지, 촤르륵! 감기는 그 맛, 그야말로 옷의 ‘감칠맛’에 한껏 집중해 보자. 

엘르,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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