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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산업

[Close-up] 산업디자인의 거장 멘디니

“기업·디자이너 관계 부부와 같아 싸움 벌어지면 아내 말을 들어야”
 


서울 청담동의 ‘차움(CHAUM)’. 차병원이 ‘미래형 병원’이란 구호 아래 지상 2~7층 6개 층 연면적 2만㎡(약 6000평) 규모로 마감공사를 하고 있는 이곳에 14일 특별한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적 산업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멘디니(79·사진)였다. 그는 다음 달 개관하는 이 병원의 로고 디자인을 총괄했다.

17∼18일 ‘디자인 서울 국제회의’ 참석차 방한한 그는 이 병원의 내부 디자인과 제복·시트 등 곳곳에 들어갈 로고를 점검했다. 기자와 함께 병원을 돌아다닌 두 시간 내내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지만 마음에 꼭 들지 않는 부분에 대한 지적을 할 때는 거장(巨匠)의 기운이 물씬 났다.

“원내 카페 벽면에 들어간 로고의 바탕색이 너무 탁하다.”

“운동센터의 창에 새겨진 로고를 더 눈에 확 띄게 할 수 없느냐.”

멘디니는 1931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나 필립스·카르티에·에르메스·스와로브스키 같은 명품 브랜드 디자인으로 명성을 쌓았다. 80년대에는 진보적 디자인그룹 ‘멤피스’의 일원으로 급진적 디자인 운동을 주도해 이 분야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78년작 ‘프루스트 의자’, 94년작 알레시의 와인 오프너 ‘안나 G’ 등이 꼽힌다. 그의 작품은 뉴욕 현대미술관, 파리 퐁피두센터 등에 영구 소장돼 있다.

그는 근래 LG전자·LG하우시스·한국도자기·롯데카드 등 국내 기업들과도 많은 작업을 했다. LG전자가 지난해 9월 출시한 ‘멘디니 디오스 김치냉장고’는 국내 프리미엄 김치냉장고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멘디니는 “산업디자인은 실용성이 우선이지만 창조에 관한 욕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상업성과 미학의 조화가 필수적이란 이야기다. “기업과 디자이너는 부부와 같다”는 비유도 했다.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결국 아내(디자이너)의 말을 들어야 가정이 화목하다”는 것이다.

근래 한국 기업의 제품 디자인 작업을 더 자주 하는 것 같다고 물었더니 “내 고향 이탈리아와 한국 소비자의 성향이 비슷한 것 같다”고 응수했다. “반도 국가라는 공통점을 우선 꼽지만, 2000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주변 지역을 호령한 호쾌한 민족적 기질도 공유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 기업과의 공동작업이 프랑스 등 유럽 기업보다 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며 웃음지었다.

알렉산드로 멘디니가 디자인한 한국 기업의 제품과 로고. 왼쪽 큰사진부터 시계방향으로 LG전자의 2011년형 ‘LG 디오스 김치냉장고 쿼드’, 한국도자기의 도자기 세트, 차움의 로고. [각 회사 제공]
 
다음은 알렉산드로 멘디니와의 일문일답.

-가장 최근작이 차움의 로고다. 어떤 점을 강조했나.

“병원은 결국 안식을 얻는 곳이다. 진료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몸이 더 나아질 것 같다’는 기대를 줘야 한다. 이번 로고는 색상이 밝고 모양도 번개 모양으로 진취적이다.”

-멘디니 디자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산업디자인은 생활과 융합해야 한다. 불편하다면 의미가 없다. 프루스트 의자도 그렇다. 등을 뒤에 붙이고 편안하게 앉을 수 있게 만들었다. 요즘 의자들은 좀 불편한 면들이 있더라. 프루스트 의자는 색상 등은 리모델링해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인기가 있다면 기분은 좋다.”

-한국에서 멘디니가 디자인했다면 고급 제품이라고 여기는데.

“디자이너로서 그런 평가를 받으니 행복할 따름이다. 많은 이에게 호감을 주는 디자인보다 뛰어난 건 없다.”

-산업디자이너가 경계해야 하는 점이 있다면.

“디자인은 수공업적 요소가 있다. 대량생산 제품에 자신의 디자인이 노출됨으로써 의식조차 상업화될 우려가 있다. 그러다 보면 창의성도 사라질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1분에 한 개씩 팔린다는 와인 병 오프너 ‘안나G’에 대해 한 말씀 하면.

“자주 하지 않는 이야기인데, 그 오프너는 어떤 행사 때 초대받은 인사들한테 기념품으로 주려고 만든 것이다. 그게 너무 인기를 끌다 보니 대량생산하게 됐다. 그 제품이 여성 이미지를 본뜬 것이라 그런지 ‘왜 남자친구는 없느냐’는 말이 많아 남성 이미지를 띤 와인 오프너도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밝은 색상을 선호하는 것 같다.

“일을 할 때 ‘차가운 머리’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가슴은 뜨거워야 한다. 젊게 살려고 노력하고, 나만의 색감을 지키려고 애쓰다 보니 밝은 색이 주종으로 자리잡은 것 같다.”

문병주 기자 [byungjoo@joongang.co.kr]  
[중앙일보] 2010.09.16 00:29 입력 / 2010.09.16 00:2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