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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그림읽어주는 남자

나는 어머니께서 200원 짜리 조립식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식칼을 들고 자살소동을 벌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몇 달 전에 그랬다는 건 아니고, 지금은 기억조차 아득한 옛날옛적. 그러니까 컬러 텔레비전이 일반 가정에 보급되기 이전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의 고민들은 대개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하면 웃음도 안 나올 정도로 가벼운 일이지만, 과연 그게 누구에게나 그러할까? 당시 그 200원짜리 고급 프라모델은 적어도 내게 있어서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있는 이판사판의 문제나 다름없었다.

글 | 남대남 일러스트라이터(statchs@hotmail.com)
에디터 | 정윤희(yhjung@jungle.co.kr)

어린아이의 세계는 동심이 지배하는데, 동심이란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가지고 있는 순수한 세계관이다. 굳이 사전을 뒤져보지 않아도 순수의 뜻이 다른 어떤 것에 영향받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고 알 수 있으니 이 ‘동심 = 순수’의 공식은 맞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동심은 철저히 주관과 감성에 기초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친구는 무조건 때려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 보다는 자신에 대한 만족이 우선인 것이라, 항상 어린아이는 자기자신이야말로 자신만의 세계의 군림하는 절대군주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순수하게 조립식 장난감이 가지고 싶었을 뿐이란 거고, 그것을 사 주시지 않은 내 어머니는 감히 제왕에게 반역을 꾀한 격이라. 세계를 지배하시는 대왕께서 역모에 노하시사 응징의 식칼을 뽑았지만 차마 어머니를 찌르진 못하고 칼 끝을 자신의 심장으로 돌리고 말았노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마침 칼을 뽑고 보니 스스로의 목숨으로 협박하면 사 주실 것 같기도 했다만, 뭐… 끝내 무시하셨기 때문에 제왕의 분노는 그냥 찌그러졌고 야간에 퇴근하신 아버지께 엄청나게 꾸중 듣고 말았다. 하지만 그게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앞집 재국이도 그렇게 살았고, 옆집 승도 형도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먼 옛날, 예술 태동기 이전의 원시인들도 이런 마인드로 삶을 살았다.
그들은 생활 자체가 주관적이었고, 타고난 지능이 낮았기 때문에 일생 동안 이기심과 동심의 극치를 달렸다. 배고프면 옆 동굴의 다른 원시인이 먹는 것을 빼앗고, 아이를 낳고 싶으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탐했다. 근친상간은 기본이었고, 살인과 약탈은 일상이었던 시기였으니 이런 그들이 구태여 동심을 찾아 다닐 필요가 없었고, 예술을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렇게 살다 보니 먹고 살기가 어려워졌다. 무리를 지어 살아야 보다 풍족한 사냥터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개인의 전투 테크닉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치더라도, 농사를 짓게 되자 군집 사회를 이루어야 할 필요성이 생겨버렸다. 애당초 농사라는 것은 혼자 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무리를 짓게 되면서 규범이 발생했고, 이 규범. 즉 법률이 나타나면서 모두가 따라주어야 하는 보편적인 이성이 탄생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당장 알 수 있듯이 발전과 이성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이 주관이 온전하게 지배하는 자신의 세계. 동심을 벗어나 이성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는 사회로 편입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나 예외가 있듯이, 현대 사회의 기본 구조에 반기를 드는 이단자들이 발생했다. 바로 예술가들이다.

이 예술가란 족속들은 모름지기 인간의 본질을 노리는 자들이다. 우리의 인지 가운데 가장 인간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본능이고, 그 다음은 주관과 감성이다. 하지만 본능에 충실했다간 외설로 찍히거나 전과자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주관과 감성에 매달려야 했는데, 그런 선택의 여지는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살인 금지, 강도질 금지 등의 공통된 규범이 있다지만 사회마다 그 규범이 조금씩 다르고 관습 역시 세월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규범의 아버지 뻘인 이성을 노래해 봐야 지구상의 모든 이들의 공통된 형질. 즉 본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감성에 매달리게 되는 것인데, 차라리 다행이라고 할까. 우리는 누구나 한번씩 그 감성의 아들 뻘쯤 되는 주관이 철저히 장악한 세상에서 폭군 노릇을 자행해 본 경험이 있는 것이다. 자, 한때의 폭군들이었던 사람들이여, 다음의 그림을 보라.

몽환이 지배하는 이 세상. 주인공은 왕관을 쓰고 있는 어린 아이다. 어린아이가 왕관을 써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라면, 그곳은 어린 아이의 세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주관만이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는 동심의 세계다. 하지만 여느 작가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에 대한 회상처럼, 아련한 그리움이 피어오르는 갈대가 피어난 오솔길이 아니다. 파스텔톤의 몽환은 맞지만 뭔가 심상찮다. 음습하기도 하고, 섬뜩할 수도 있는 느낌. 하지만 분명히 낯선 느낌은 아니다. 부모의 슬하에서 절대권력을 보장받아야 할 어린 시절에 이런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거기 동조하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선 이제 뜯어보아야 한다. 먼저 주인공. 절대군주인 어린아이를 보자.
머리에 왕관을 쓴 존재. 옛날 전제정치 체제에서 군주를 그린 그림을 보면 항상 절대군주는 항상 화면 정 중앙, 거기서도 한 가운데에서 위엄을 뽐내고 있다. 이 구도는 무척이나 중요하여, 중세회화의 철칙이었다. 만약 화가가 군주를 한쪽 구석이나 어둠 속에 짱박았다가는 그날로 지하감옥에 끌려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드릭 역시 군주의 왕권을 의심하지 않기에 이 규정을 준수하고 있는데, 이 세계의 절대군주는 화면 중앙의 탁자에 앉아있다. 머리에 왕관까지 하나 얹었으니 나름 절대권력은 맞는 것 같은데 이게 웬 일. 눈이 하나뿐이네.
정확히는 두 개 다 있지만, 한쪽 눈에 안대를 댄 상태다. 실제로 눈알이 빠졌는지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분명한 것은 왕의 옥체에 기스가 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얼굴에 그려진 표정조차 권력의 단 맛을 한없이 누려온 왕의 얼굴이 아니라, 마치 강대국들에 밀려 왕국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힘없는 왕의 표정을 떠올리고 있다. 일단 접어놓고, 그 다음은 배경을 보자.
모름지기 왕을 그린 그림에는 중앙에 절대군주를 배치하는 법이지만, 그 배경에도 역시 왕권을 상징하는 심볼을 그려 넣는다. 세계의 왕이라 부르는 기독교의 신을 그린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다. 무한한 사랑이 넘치시는 분답게 이 분께서는 예술가들을 위해 친히 삼위일체를 구성하사, 자연스레 중앙에는 하느님. 즉 성부의 본체를, 좌우에 성자와 성령을 그려 넣을 수 있는 삼각구도를 맞출 수 있는 배려를 베푸시지 않았던가.
이 그림에도 역시 왕권을 상징하는 중대한 구성요소가 배경에 떠 있다. 친절하게 왕관까지 씌워가며 경배하려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절대군주의 왕권에 일말의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이므로, 그가 왕 본인만큼이나 중요한 왕권을 조그맣게 그려서 구석에 처박았을 리가 없다. 그러니 배경 가운데 가장 크고 눈에 확 들어오는 것, 바로 초승달이 왕권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초승달은 왕의 분신인 왕권을 나타낸다. 대다수의 왕들은 왕권을 빼앗기는 순간 유폐 내지는 추방, 심지어 처형까지 당할 정도이니 왕권이라는 것은 왕보다 중요할 수도 있겠다. 아니나 다를까, 이 세계의 왕의 분신인 초승달은 하늘에서 가장 큰 행성들마저도 그 품에 포용 중이다. 하지만 역시 이 왕권도 문제가 있다. 꽉 찬 만월이 아니라 초승달인 것이다. 권력은 신하들의 인정이 있어야 지탱되기 마련이고 왕은 신하를 포용하는 존재이니만큼 저 초승달이 왕권의 상징이 맞다면 하늘의 행성들은 신하라고 볼 수 있는데, 이미 조그마한 별들 몇 개가 빠져나갔듯 그의 세계를 지탱하던 나머지 신하들의 거취 변경도 사실상 시간 문제나 다름없다.
자, 그리고 이렇게 보면 의미적인 화면은 완전히 두 개로 분할될 수 있겠다. ‘천상에서 신하를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왕권(초승달) vs 지상에서 시름에 잠긴 왕(어린 아이)’ 그렇게 파악하면 그의 주변에서 함께 탁자에 앉아있는 검은 고양이를 위시한 조그마한 군상들의 정체 역시 자연스레 드러난다. 모두 왕의 신하들인 것인데, 그들은 기괴한 모습을 띄운 채 누구도 자신들의 왕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이미 마음이 떠났으므로 배신을 준비 중일 것이다.
사실 왕에게는 공주고 왕자고 다 필요 없다. 권력이야말로 왕의 모든 것이고, 받들어 모셔주는 신하야말로 권력의 결정체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신하. 즉 권력의 정수를 잃은 왕이 기분이 좋아 덩실거리며 춤을 출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가 수심에 잠긴 이유는 이렇게 왕권의 상징인 초승달에서 들통났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을 경우,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경우라면 어린아이는 일단 분노하고, 다음은 행동에 옮긴다. 나처럼 식칼을 손에 쥐고 자살소동을 벌이는 극단적인 경우가 있기도 하겠지만, 대다수의 행동 수준은 크게 울며 보채다가 배를 까고 삐지는 거다. 하지만 이 아이는 울 힘도, 삐질 기력도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한쪽 눈까지 잃어버렸다. 이미 도저히 두 눈뜨고는 차마 용납할 수 없었던 반역에 당한 것이라, 지나가 버린 일에 대한 아쉬움. 체념이 아이의 수심의 정체다. 그렇다면 그 용납할 수 없었던 반역이란 무엇일까? 물론 작가는 그것도 그림에 드러냈다.

왕들이 가장 크게 상처받아 의기소침할 때는 언제일까? 물론 왕권을 잃었을 때이다. 하지만 외적과 싸우다 전쟁에 패배하여 왕권을 잃었다면, 그건 비분강개할 일이지 의기소침할 일이 아니다. 보통 아끼는 신하. 혹은 측근의 배신으로 왕권을 잃었을 때 왕은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 왕이 괴로워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꼬마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신하가 그를 배신했고, 꼬마는 강제적으로 자신의 세계 속 왕권을 박탈당한 것이다.
측근의 배신으로 쫄딱 망해 목숨(과도 같은 왕권)을 잃은 왕이라. 이게 얼마나 슬픈 이야기인지, 대문호 셰익스피어도 이걸 소재 삼아 글을 남겼다. 리어왕이라고, 다들 아마 최소한 몇 번은 들어봤을 거다.
하지만 왕권은 그냥 빼앗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 메로빙거 왕조의 마지막 왕은 피핀에게 장발을 삭발 당했고 한나라 천자는 십상시의 난 때 옥새를 날리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렇게 무언가 왕권을 상징하는 심볼이 필요한 것인데, 초승달로 상징되는 왕권은 박탈될 수 없다. 물리적으로 달을 따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 해당하는 어떠한 상징을 빼앗김으로서 어린아이는 주관의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주권을 빼앗기고 강제적으로 이성과 규범이 지배하는 현실세계로 내몰린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 안에서 옥새에 해당하는 심볼을 찾는 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미 빼앗겼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물건이 나타날 리가 없다. 하지만 그 물건이 있던 자리는 알 수 있다. 중상을 입고 안대로 가려버린 아이의 오른편 눈이다. 눈알이 빠진 것이 아니다. 실제로 눈알이 빠졌다면, 그림이 이 정도로 건전하게 나올 리가 없다. 아이는 그것을 빼앗기는 것이 그야말로 눈알이 빠질 정도로 아팠던 것이고, 실제로 어딘가에 눈알이 빠져나가 뻥 뚫린 구멍처럼 커다란 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뭘까?
가만히 아이의 양 손 부근을 보자. 가느다란 실이 있는데, 그 실은 그의 신하들의 손에 끄트머리가 쥐어져 있다. 아이는 양손으로 실을 눌러, 그 실을 움직이는 것을 될 수 있는 한 방해하려 하고 있는 중이다.

심복 중의 심복이 할 수 있는 일.
하지만 아이가 바라지 않는 일.

그리고 가느다란 실 한 가닥을 써서, 아이에게 눈알이 빠질 정도로 충격을 주어 단 한 방에 독선과 주관이 지배하는 아이의 세계에서 배려와 이성이 장악하는 어른의 세계로 무자비하게 끌어올릴 수 있는 것은? 명탐정의 추리를 위한 실마리들은 거의 다 나왔다. 답은 하나 뿐. 아이는 이를 뽑고 어른이 된 것이다.

어쩌면 이를 뽑자마자 ‘이젠 우리 드릭, 이도 뽑을 정도로 다 컸으니 어른이 되어야지~’ 하는 말을 들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이를 뽑힌 것도 서러운데 자기 세계의 주권마저 박탈당하고 무서운 세계로 내몰렸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만, 하여간 이 참혹한 반역 사건은 드릭이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에도 잊지 못할 공포로 남았다. 하지만 사실 작가 드릭이 실제로 이를 한 개만 달랑 뽑았던 한 다스는 될 정도로 대량으로 뽑았던, 아니면 진짜 눈알을 뽑았던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웃으며 이를 뽑을 수 있었던 용자는 별로 많지 못하다는 사실과(나는 치과에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치과에서 쫓겨났었다), 어려서 충치 안 뽑아본 사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어린아이의 악몽과도 같았을 예술가 드릭의 이상한 세계와 우리의 어린 시절의 파장은 자연스레 일치하는 것이다.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직관적인 감성을 소중히 하려는 자가 설 곳이 그리 마땅찮은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객관 만을 최고로 치는 현대의 대한민국 사회에서라면 감성을 소중히 하는 이는 바로 이단아로 지칭되어 별종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스팩 상승과 토익 점수가 사회를 달구고 인터넷 게시판마다 분석글과 고찰글이 난무하며, 좀 더 그럴싸한 분석을 하여 적어낸 사람에게 '능력자'라는 호칭을 붙이는 이 현실.
주관이 지배하는 세계를 가장 잘 알려줄 수 있는 음악과 미술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도 전에 자율학습으로 대치되어 사라지고, 국어 교과서에 등재된 옛 시조에서는 시의 감상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를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분석이 끝난 공식으로 치부하여 단지 의미 암기만 주야장창 시켜대고 있다. 그런 판에 논술과목을 수학능력시험에 배치하면 뭐가 달라지겠는가. 이런 교육을 받고 나온 사람들이라면 일단 신문의 기사를 많이 읽어 암기 거리를 늘린 다음, 머리 속에서 짜깁기만 해도 얼마든지 채점자가 만족할 정도로 답안지를 채워나갈 수 있을 터인데.

이렇게 주관이 마비당한 사람들은 그들 스스로의 발 밑이 불안하니 아귀다툼을 벌여서라도 남들 위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고, 이런 것들이 대세로 자리잡은 풍조 속에서 그들은 주관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들을 백안시하고, 질시하며 상처를 주는 법이다. 자신들은 잃어버린 것을 저들은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잇값을 못한다며, 아직 뭘 모른다며, 혹은 순진하다며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주관을, 동심이 지배하던 어린 시절을 고이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모두 전사들이 되어, 지고무상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승리한다는 보장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세상과 싸워나간다. 번번이 상처를 입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멍청해서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이 백기를 들고 세상에 영합하기만 하면 편안한 것을 결코 모르는 것이 아니다.
일신의 영달이 보장된 좋은 학교, 훌륭한 직장을 걷어치우고 나와서까지 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새까맣던 어린 시절부터 주관과 동심을 잊지 않고 간직해 온 사람들부터 그들까지,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감성적인 주관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싸움으로 단련된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숙련된 전사들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일신의 영달이 아닌 지고무상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전사 계급을 존중하는 것 역시 인간의 오랜 관습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돈이 없어 찢어지게 가난해도,
산수를 전혀 못하는 것처럼 머리가 나빠 보여도,
영어단어를 쏘리와 헬로우 딱 두 개 밖에 알지 못해도
일단 예술가라는 딱지만 붙이고 나면 존중 받는다.

이들은 전혀 포기하지 않고 동심을, 주관을, 감성을 지켜가며 영혼의 본질을 향해 걷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남아있는 이를 죄다 뽑아버린다 한들, 적어도 저 정도의 출혈로는 드릭의 앞을 막아서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