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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패션

무늬를 입고 레깅스가 당당해지다

패션에로티시즘을 주창한 패션심리학자 제임스 레버(James Laver)는 일찍이 패션의 변천 배경을 '성감대의 이동'으로 설명했다. 1930년대는 엉덩이가 성감대였고 1940년대는 허리와 가슴이, 1950년대는 다시 엉덩이, 1960년대는 맨 살이 성감대로서 패션 유행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레버 식으로 말하면 2010년의 성감대는 '하체' 혹은 '각선미' 쯤 될까. 입었으되 벗은 것 못지않은 노출 효과를 내는 레깅스(leggigns)가 세대와 계절을 넘나드는 전천후 패션아이템으로 등극했다.


레깅스는 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성 패션으로 첫 손에 꼽힌다. 남녀심리탐구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케이블TV 프로그램 '남녀생활탐구'가 얼마 전 방영한 내용에 따르면 남자가 이해 못하는 대표적인 여성패션 3가지에 레깅스를 필두로 킬힐(굽 높이 10cm이상 구두), 스모키화장(눈가를 검게 표현하는 화장법) 등이 꼽혔다.

그러나 나이 불문, 여자들이 총애하는 패션 아이템도 레깅스다. 가을겨울철 타이츠를 대체하던 레깅스가 올 봄여름엔 한층 강렬해진 디자인으로 존재감 뚜렷한 패션 상품으로 부상했다. 이용자 층도 풋풋한 10대 여학생부터 40, 50대 중년 여성까지를 아우른다. 엉덩이부터 종아리까지 하체의 곡선을 고스란히 드러내 한때 '민망패션'의 대명사였던 레깅스가 뭇 여성들의 사랑을 받으며 화려하게 비상하는 이유는 뭔가. 레깅스 한 장이면 노출 따윈 두렵지 않다는 것일까.

패션홍보회사에 다니는 김명희(32)씨는 레깅스 예찬론자다. 편하고 멋스럽고, 무엇보다 대담한 패션을 시도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 노릇을 한다는 이유다. "하늘하늘한 소재의 짧은 원피스나 숏팬츠를 입을 때 레깅스를 받쳐 입으면 노출 부담을 줄이면서 최신 유행을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주부 조명아(44)씨도 레깅스를 자주 입는다. "상의를 길게 입으면 엉덩이는 가릴 수 있고, 다리 선이 드러나 바지차림보다는 좀 더 여성스러워지는 기분"이란다.


남성들에겐 벗은 것도 아니고 가린 것도 아닌 애매한 패션인 레깅스룩이 여성들에겐 노출과 여성미를 드러내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건 꽤나 흥미롭다. 패션칼럼니스트 조명숙씨는 레깅스 패션의 인기를 "날렵한 신체를 노출하고 싶다는 욕망과 실용성이 타협한 결과"라고 분석한다. 레깅스를 입으면 신체를 드러내면서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과도한 노출이라는 비난을 비껴갈 수 있다는 것이다. 80년대 복고주의 패션의 재등장으로 상후하박(상의는 풍성하게 하의는 날씬하게 표현하는 것) 스타일이 인기를 얻는 것도 레깅스 열기에 일조한다. 풍성한 니트나 원피스를 입으면 '민망한' 엉덩이 노출은 피할 수 있다.

물론 하체를 강조하는 것이 레깅스만의 특징은 아니다. 2000년대 중반까지 디올옴므를 이끌었던 패션디자이너 에디 슬리먼의 스키니룩도 바짝 마른 하체에 시선을 집중시킨다. 날렵한 하체는 현실에 초연한 이른바 '쿨(cool)한'감성을 대표한다. 다만 레깅스가 스키니보다 더 쉽게 세대의 벽을 넘나드는 것은 스키니는 태생이 겉옷이지만 레깅스는 속옷이면서 겉옷이어서 레이어드(겹쳐입기)를 이용한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올해 레깅스는 무늬를 입었다. 검정이나 짙은 회색 등 무늬 없는 무채색 계열로 믹스&매치 스타일을 위한 서포터 역할에 충실했던 레깅스가 독립된 패션 아이템으로 존재 선언을 한 셈이다. 화려한 프린트와 지퍼, 주름장식 등 디테일을 살린 레깅스가 유행 상품으로 떠올랐다.

김은정 쿠아 디자인실장은 "얼룩덜룩한 스톤워싱 데님 스타일의 청레깅스, 로맨틱한 레이스 레깅스, 월드컵 이슈를 반영한 아프리카 패턴, 주머니를 만들어 겉옷으로서의 효용성을 더한 것 등 이번 시즌 레깅스는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강력한 이미지를 자랑한다"고 말한다.

레깅스는 함께 연출하는 옷 스타일에 따라 길이와 무늬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김 실장은 "소매 없는 티셔츠나 원피스에는 종아리 길이의 7부 스톤워싱이나 레오파드 무늬 레깅스로 발랄하게, 긴 테일러드 재킷에는 발목에서 끊어지는 8~9부 정도의 레이스 레깅스를 곁들여 매니시하게 연출하는 것이 멋스럽다"고 조언했다.

이성희기자 summer@hk.co.kr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10/05/13 21:3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