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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컬처 파워, 독일의 선택 ②

컬처 파워, 독일의 선택 ② 장인정신으로 빚은 ‘베를린 뉴 뮤지엄’

10년 전, 박물관 복원 구상 때부터 조명만 생각했다

미세한 빛을 빚어낸 장인의 손길이 3000년 전 조각상에 새 숨결을 불어넣었다. 지난해 10월 16일 새로 문을 연 베를린 뉴 뮤지엄(노이에스 뮤제움·Neues Museum)에서 관람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네페르티티(Nefertiti)의 흉상 얘기다. 네페르티티(기원전 14세기)는 이집트 제 18왕조의 파라오 아크나톤의 왕비다. 석회석에 색이 입혀진 흉상이지만, 지금까지도 반짝이는 그녀의 눈은 금방이라도 말을 걸어올 것처럼 생생하다. 수많은 실험 끝에 결정된 다섯 자락의 빛 줄기, 뉴 뮤지엄의 자존심은 여기에도 깃들어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때 파괴돼 70년 동안 방치됐다가 복원에 착수한 지 10년 만에 문을 연 뉴 뮤지엄. 이곳은 영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중 한 사람인 데이비드 치퍼필드(David Chipperfield)의 독특한 건축철학이 반영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 것이 또 하나 있다. 10년에 걸친 조사와 분석, 시뮬레이션 작업을 통해 건축과 전시품에 ‘빛’을 더한 조명 디자인이다.

◆가상 3D 모델로 실험=뉴 뮤지엄의 전체 조명을 책임진 조명 디자이너 가브리엘 폰 카도르프(Gabriel von Kardorff·카도르프 엔지니어 공동대표)씨를 지난달 말 뉴 뮤지엄에서 만났을 때,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도전(challenge)’과 ‘시험(test)’이었다. 역사적인 건물의 보존과 복원 과정에서 조명의 역할은 자연계의 비밀을 풀어내는 연구실(laboratory)에 비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베를린 뉴 뮤지엄의 계단이 있는 홀. 2차대전 때 지붕이 무너져내릴 정도로 철저히 무너져 나무가 자랄 정도로 방치돼 있었다. 복원을 맡은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는 계단의 원형을 살리면서도 원래 있던 장식을 걷어 내고 단순하게 벽돌로만 채웠다. 조명은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고 차분한 분위기다. [뉴 뮤지엄 제공] 
  
“1855년 처음 세워진 뮤지엄은 오직 자연채광만을 염두에 둔 건물이었습니다. 6m에 달하는 거대한 유리창과 유리 천장으로 지어졌지요. 그런데 건축가인 치퍼필드은 유리 천장이 무너진 자리에 지붕을 얹기로 했죠. 예전과 조건이 완전히 달라질 수 밖에 없었어요. 자연광선과 인공조명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그가 조명 디자인 작업에 착수한 것은 2000년. 건물이 복원되지도 않은 상태였으니 수천 년이 넘은 조각과 보물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놓여질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주어진 조건을 돌파할 무기는 ‘실험’밖에 없었다. 복원될 건물에 들어올 빛의 양을 계산하고, 3D 입체 모델을 만들고, 완성된 모양을 예상한 동영상을 만드는 등 다양한 시뮬레이션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의 작업은 집요했다. 계절에 따라, 시각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자연광과 인공조명이 만나 빚어내는 빛깔의 변화를 일일이 점검했다. 심지어 3D 건물영상을 만들어 각 전시실의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도 확인했다. 각 공간의 상황에 따라 특별 주문해 맞춘 조명기기만 100여 종이 넘는다. “건물과 전시품에 그림자가 어떻게 드리워질지, 또 눈부심을 어떻게 막고 고른 빛을 만들어낼지를 연구”했다는 설명이다.

  

최적의 조명을 위해 숱한 실험을 거친 네페르티티 흉상. 오른쪽 눈의 동공을 비추기 위해 LED 조명을 썼다.
 
◆철저하게 계산된 빛=절제미를 추구하는 치퍼필드의 건축과 조화를 이루는 것도 관건이었다. 건축가는 총탄 자국이 난 건물 밖의 기둥을 남기는 등 전쟁이 남긴 상흔을 그대로 보존했다. 실내에 화려했던 장식이 지워진 부분은 원상대로 복구하지 않고 장식 없이 메우는 식으로 현대적인 감각을 보탰다. 여기에 맞춘 조명의 컨셉트는 “너무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으면서 신중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전시품 중에서는 네페르티티에 대한 작업이 가장 까다로웠다고 한다. “빛에 극도로 예민한 작품입니다. 빛의 양과 앵글이 조금만 바뀌어도 완전히 다른 인물로 보여서 크게 놀랐습니다. 전에는 소녀처럼 보인 적도 있었지만, 빛을 잘 비추어보니 성숙하고 아름다운 여성이에요. 빛이 그의 나이와 성격을 되살렸죠.”

가브리엘은 뮤지엄이 문을 연 후에도 6개월 동안 현장을 떠나지 못했다. 좀더 완벽한 조명을 위한, 미세한 조정 작업 때문이다. “끊임없이 분석하고 실험하며 보낸 10년이 조명 디자이너로서 가장 감동적인 시간이었습니다.”

베를린=이은주 기자

◆뉴 뮤지엄(Neues Museum)=독일 베를린의 뮤지엄 아일랜드에 있다. 프레드리히 아우구스트 슈틸러의 설계로 1841~59년까지 18년에 걸쳐 건축됐다.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폭격으로 많은 부분이 손상됐다. 97년 복원 공모에서 데이비드 치퍼필드와 줄리안 하라프가 당선돼 작업했다. 재건 비용은 3억4700만 달러(약 3663억원). 치퍼필드는 건물의 원형을 존중하면서도 새로운 건축을 덧대는 방식을 택했다. 지난해 개관 당시 “전쟁의 흔적을 지나치게 많이 남겼다” “원형에 충실하지 않았다” 등 논란이 뜨거웠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중앙일보] 2010.07.14 00:29 입력 / 2010.07.14 00:31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