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esign Trend/시각

눈속임 그림 … 유쾌한 착각의 미학

[J 스페셜 - 목요문화산책] 문소영의 명화로 읽는 고전
낙엽의 계절에 보는 오 헨리 『마지막 잎새』

그림 ①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의 부분(1508~12),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작. ‘아담의 창조’ 네 모서리의 대리석 장식이 진짜 튀어나온 조각처럼 보이지만 평면의 그림이다.

“긴 밤 내내 비가 후려치고 바람이 격렬하게 휘몰아쳤는데도 벽돌 벽에 담쟁이 잎 하나가 아직도 남아있었다. 덩굴에 붙어있는 마지막 잎새였다.” 기상청의 예보대로라면, ‘마지막 잎새(The Last Leaf·1905)’의 저 구절처럼, 곧 한바탕 비가 내릴 것이고, 마른 잎들이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가로수 가지들은 텅 비게 될 것이다. 소설에서 저 ‘마지막 잎새’는 진짜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젊은 화가 존시가 병에 지친 나머지 창 밖의 담쟁이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으리라는 망상에 사로잡히자, 이웃의 실패한 노(老)화가 베어먼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밤새 비바람을 맞으며 벽에 그려놓고 급성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걸작이었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이런 의문이 떠오른 독자도 있을 것이다. 저렇게 진짜 같은 나뭇잎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양반이 왜 그동안 성공을 못한 거지?

그림 ② 그림의 뒷면(1670), 코르넬리우스 N 헤이스브레흐트(1630~?)작, 캔버스에 유채, 66.6x86.5㎝, 국립미술관, 코펜하겐

미국 작가 오 헨리(O Henry· 1862~1910)가 쓴 이 단편소설에서, 베어먼이 존시를 위해 그린 담쟁이 잎새는 트롱프뢰유(Trompe-l’oeil·프랑스어로 ‘눈을 속인다’는 뜻)라고 불리는 그림 범주에 속한다. ‘미국 트롱프뢰유의 대가’ 윌리엄 하넷의 작품(그림)을 보면 왜 ‘눈속임 그림’이라고 부르는지 알 수 있다. 저 노란 편지봉투의 튀어나온 끝을 잡아보려고 다가갔다가 놀란 관람자가 많지 않았을까? 화가 입장에서는 속이는 재미가 있고, 속는 관람자 입장에서도 불쾌하지만은 않은 반전(反轉)의 즐거움이 있는 그림이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는 하넷의 작품을 비롯한 눈속임 그림이 꽤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마지막 잎새’의 배경인 20세기 초에는 한물간 장르로 취급받고 있었다.

 좁은 의미의 트롱프뢰유는 하넷의 그림처럼 장난스러우면서 장식적인 정물화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정밀한 묘사와 명암법 등으로 평면의 그림이 입체의 실물로 보이도록 착시를 일으키는 모든 테크닉을 가리킨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근대(Modern)미술이 나타나기 전까지 서구 화가들의 주요 과제 중 하나가 2차원 화폭에 3차원의 현실세계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그림이 트롱프뢰유 기법과 직간접적인 관련을 가졌다. 심지어 르네상스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에도 트롱프뢰유적인 부분이 있다. (그림①) 유명한 ‘아담의 창조’ 네 모서리에 있는 대리석 조각 장식은 진짜로 튀어나온 부조처럼 보이지만 그들도 사실 평면의 그림인 것이다.

그림 ③ 헐링씨의 편지꽂이 그림(1888), 윌리엄 M 하넷(1848~92)작, 캔버스에 유채, 76.2x63.5㎝, 개인 소장 

장난스러운 트롱프뢰유 정물화는 서양미술의 이런 전통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으로서, 17세기 후반에 본격적으로 발달했다. 그중 가장 기발하고 유머러스한 작품은 플랑드르 화가 코르넬리우스 N 헤이스브레흐트의 ‘그림의 뒷면’(그림②)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면서 “왜 캔버스를 뒤집어놨지? 앞에는 무슨 그림이 있을까?” 하면서 손을 뻗다가 “헉” 하고 놀랐을 것이다. 캔버스의 뒷면으로 생각했던 것이 바로 그림이니까. 그 순간 화가는 신나게 웃었을 것이고.

 그런데 깊은 공간을 나타낸 그림의 경우, 관람자가 조금이라도 비스듬히 그림을 보면 그 공간감이 무너지면서 진짜 같은 느낌도 사라져 버린다. 그래서 트롱프뢰유 정물화는 편지, 돈 등 평면적인 물건을 등장시켜 원래부터 깊은 공간감이 없게 그려지곤 한다. ‘마지막 잎새’의 담쟁이 잎새도 평면적인 오브제라서 존시의 눈을 제대로 속일 수 있었으리라.

 이렇게 트롱프뢰유는 교묘한 구성과 정밀한 묘사를 필요로 하지만, 수준 높은 예술로 평가받지는 못했다. 과거 서구 회화에는 서열이 있었는데, 역사·신화·종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이 가장 높은 대접을 받았고, 정물화는 꼴찌였다. 더구나 정물화 중에서도 장난이 목적인 트롱프뢰유는 경박한 손재주로 여겨졌던 것이다.

 게다가 사진술이 발달하면서 ‘진짜 같은 그림’은 더 진짜 같은 사진에 밀려 존재 가치를 점차 잃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에서는 에두아르 마네 같은 화가들이 ‘그림은 현실 사물의 재현이 아니라 독립적인 색의 배열’이라 선언하고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무시하면서 근대미술이 일어났다. 그후 더 과격한 아방가르드 미술이 일어났고 당시 미술의 변방에 불과했던 미국에도 그 기운이 감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잎새’에서 “40년간 붓을 휘둘러 왔지만 예술의 여신의 치맛자락을 잡을 만큼 가까이 가보지 못한” 베어먼은 기껏해야 트롱프뢰유나 잘 그릴 수 있는 뒤처진 화가였을 것이다.

 사실 존시와 그녀의 친구 ‘수’도 젊다는 것 외에는 베어먼보다 처지가 나을 게 없다. 그들은 가난하고, 당시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가 아니라 워싱턴에 있으며, 또 그때까지도 마이너리티에 불과한 여성 화가들이었으니까. 아마 폐렴 외에도 이 모든 상황이 존시를 지치게 하고 회복해서 살고 싶다는 의욕을 잃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에서 실패했으나 포기한 적은 없는 베어먼은 그가 할 수 있는 트롱프뢰유 그림으로 존시에게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깨우친다. 나중에 20세기 중반 들어서 트롱프뢰유 그림들은 사진과 다르게 사물의 속성을 관조하는 예술로 재평가받게 되지만, 베어먼이 그런 미학적 차원에서 담쟁이 잎새 트롱프뢰유를 그린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가 잎새를 그린 것은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존시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그려진 ‘마지막 잎새’를 수는 “걸작”이라고 부른다. 한 생명을 대가로 다른 한 생명을 살린, 죽음과 삶이 응축된 그림이니까. 인간에 대한 단순하고도 깊은 애정이 담긴 그림이니까. 존시에게 가장 필요한 생명의 양식인 ‘희망’을 준 그림이니까. 때로는 대단한 미학이 담기지 않은, 미술사에 아무 획도 긋지 못한 그림도, 누군가에겐 ‘걸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삶과 관련된 그림이라면.

문소영 기자

카우보이·은행원·죄수 … ‘직업 백화점’ 오 헨리

오 헨리(본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그의 수백 편에 달하는 단편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직업들-약국 점원, 카우보이, 회사원, 은행원-을 실제로 모두 거쳤다. 게다가 도망자나 죄수의 이야기에도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다. 은행에서 횡령 혐의로 기소돼 남미로 도피했다가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돌아와 임종을 지킨 후 3년여간 감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이때 딸의 부양비를 벌기 위해, 자신의 다사다난한 경험을 토대로 단편소설을 써서 신문·잡지에 기고했다. 그의 단편은 유머와 허를 찌르는 반전이 특징이자 매력인데, 그런 요소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 약점이기도 해서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는 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 흥미진진한 면과 따스한 휴머니즘으로 인해 여전히 많은 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