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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21〉대안적 시도

작가를 소모품 취급하는 시장 주류들에 대한 ‘소박한 항거’
딘스타크 아벤트(Dienstag Abend)

‘딘스타크 아벤트(Dienstag Abend)’.

이름 그대로 화요일 저녁 하루 만에 시작되고 끝이 나는 독특한 형태의 전시라고 했다. 빈에 위치한 Ve.Sch(베쉬)라는 대안공간에서 작년부터 화요일마다 꾸준히 진행되어 오고 있는 행사다. 몇 달 전 참여 의사를 묻는 연락을 받고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다가 결국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수락한 터였다. 전시장의 규모가 크든 그렇지 않든 2∼3일의 짧은 준비 기간 만에 순발력 있게 장소특정적인 작품을 해냈다가 거둬야 한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매력적인 시도로 생각이 됐다.

베쉬의 운영자금 중 일부를 마련해주는 바. 나머지는 베쉬에 전시됐던 작품들. vesh.org 제공

빈으로 떠나는 날까지 구체적인 작품 구상을 하지 않았던 터라 가져가야 할 짐이 유난히 많았다.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연장과 도구가 잔뜩 든 짐가방을 낑낑대며 끌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얼마 전 카라라 대리석 채석장에 인접한 마을 토라노에서 전시됐던 내 작품을 보고 연락을 한다고 운을 뗀 그는 밀라노에서 멀지 않은 브레시아에서 전시를 기획 중이며 거기에 참여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미안하지만 자세한 건 이메일로 받고 다시 통화를 하자며 전화를 끊으려다 공항으로 가는 기차 시간이 좀 남았던 터라 난 플랫폼에 짐을 끌어다 놓고 앉아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기로 했다.

차분한 목소리로 지금까지 어떤 행사들을 만들어 왔는지 조목조목 나열을 한 그는 이번 전시가 열릴 공간은 브레시아 시내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중세 시대에 지어진 성이며 전시에서 장소가 가지는 의미가 무척 크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거기에 전시됐으면 하는 나의 작품을 찾았다며 제목까지 정확히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다고 한 것치고는 꽤 자세하게 작품을 묘사하고 있었다. 사실 어떤 조건으로 참여하는 것인지 알기 전에 대답해주는 게 조금 망설여졌지만, 본인도 작가이며 믿는 바가 있어 몇 년 째 그런 전시를 기획해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더 버티지 못하고 알았다고 해버렸다.

그제야 그는 “잘 아시겠지만 저희가 넉넉한 예산을 가지고 일을 진행하는 게 아니어서 말이죠…”라고 화제를 바꿨다. 사실 예상은 어느 정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전시를 진행하는 데 드는 비용을 설명하면서 몇 년 동안 얼마나 어렵게 행사를 진행해 왔는지 하소연했다. 그런 후에야 이번 전시에서 작가에게 지원할 수 있는 항목과 금액을 얘기해 주었다. 그때 기차가 플랫폼으로 서서히 들어오고 있었고 결국 나는 “괜찮아요. 저예산으로 어렵게 만들어지는 훌륭한 전시가 어디 한둘인 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며 그를 다독이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상업 갤러리에서 진행되는 전시가 아니라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기획전시에 참여를 요청하는 전화는 대개 이런 식이다. 전시뿐만 아니라 작품 제작 비용도 부담하며 전시를 홍보해주고 적극적으로 작품의 판매를 성사시켜주는 갤러리와의 전시는 비용 문제가 해결되는 대신 전시에 내놓을 작품을 고르는 문제부터 의견을 맞추는 일로 골치가 아프기 일쑤다. 작가가 보여주기를 원하는 작품보다는 ‘취급할 수 있는’ 즉 ‘판매할 수 있는’ 작품을 요구하는 갤러리와 타협하고 입장을 조율하는 일은 전시 진행에서 뺄 수 없는 과정이 된다.

사실 비용 문제를 접어둔다면 갤러리와 끊임없이 실랑이를 해야 하는 쪽보다는 전적으로 작품의 설치과정을 작가가 독자적으로 정할 수 있는 전시가 더 매력적이고 즐거운 법이다. 작품의 판매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만큼 전시의 기본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전시 작품의 수정이나 작가의 즉흥적이고 실험적인 시도가 쉽게 용인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안공간이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마련되는 행사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열악한 환경에 처한 주최 측의 어려움을 나눠 갖고 도움을 주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게 현실이다.

얼마 전 한국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한 작가는 두껍고 잘 정리된 그의 작품집을 선물로 주며 유럽에 전시하러 올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독특한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접근하기 쉬운 그림이었고 시각적인 임팩트도 적절히 섞여 있어 상업적으로도 상당히 용이해 보였다. 그가 한국의 한 지방도시가 아니라 미술 시장의 중심에 있는 세계 몇몇 도시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면 그는 아마 지금과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작품성과 독창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계 시장적 기준에 부합하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그에게 빠진 것은 현대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사람들과의 네트워크이다.

현대미술의 시스템을 사회 경제주의적 관점에서 접근해 풀어내는 이탈리아의 비평가, 프란체스코 폴리는 전통적인 시스템에서 작품을 생산하는 주체였던 작가가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대 미술 시스템에서는 자칫 소외될 위험에 처했음을 경고한 바 있다. 작품을 문화적으로 소비되는 상품으로 본다면 작품의 제작자는 작가뿐만이 아니라 시장을 구성하는 맴버들이기도 하다는 거다. 게다가 작품을 두고 흥정하는 능력이 딜러나 미술관 디렉터, 비평가, 컬렉터 등에 비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작가는 시장 중심의 미술 시스템에서 주인공이 아닌 종속적인 역할을 맡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대 미술가는 상당히 모순적인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표현을 하는 주체임을 보여줄 것을 강요받지만 그와 동시에, 예술가로서 주목을 받고 사회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시장 시스템의 규범화된 조건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시스템과의 관계를 재정비해야 하는 것이다.

설립한 지 3년 정도 되는 빈의 베쉬는 정부의 지원을 받아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꾸려나가는 공간이라고 했다.

시작은 마틴 베슬리가 했지만 작년부터 두 명의 젊은 작가, 루드비히 키팅거와 페르난도 메스키타가 운영에 합류하면서 전 세계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초대해 화요일 저녁에만 이뤄지는 실험적인 전시, ‘딘스타크 아벤트’를 진행해 오고 있다. 처음에는 빈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작가를 초대했지만 국제전시에 참여하며 알게 된 동료 작가와 그들의 네트워크를 통해 초대하는 작가의 국적과 활동무대의 범위를 점점 더 넓혀가고 있다고 했다. 입소문도 꽤 퍼져 비엔나에서는 대안공간으로서의 입지도 탄탄해졌다고 한다.

베쉬는 전시공간과 간단한 음료와 주류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이뤄져 있고 ‘딘스타크 아벤트’ 전시와 함께 오픈하는 바에서 누구나 저렴한 가격으로 음료를 사먹을 수 있다.

“지원금이 전시를 기획하고 작품 사진집을 출판하는 데에는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에요. 그렇다고 활동을 줄일 수도 없는 거고, B급 출판물로 만족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바를 함께 운영하는 거예요.”

전시 브리핑을 하며 루드비히가 설명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자유로워야 작가 선정에서도 지원 기관의 입김에 영향을 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했다. 그는 빈에는 코코와 매거진이라는 베쉬와 비슷한 공간이 둘 더 있지만 자신들은 상업 갤러리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모든 것을 진행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가 보여준 전시 사진에는 늦은 시간에 바에 찾아와 젊은이들과 어울려 맥주를 마시며 전시를 보고 가는 주요 갤러리 디렉터들도 있었다.

루드비히는 그들이 상업적인 미술과는 동떨어진 전시를 기획하고는 있지만 능력이 미치는 한 전시에 초대한 작가의 체류와 작품의 제작비용을 자신들이 전적으로 책임지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젊은 작가를 소모품으로 대하는 시장의 주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소장이 불가능한 실험적인 미술작품을 하면서도 비용 문제가 해결되는 걸 보여주는 게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의 소박한 ‘대안’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같은 성격의 두 번째 공간을 빈에 오픈할 계획을 진행 중이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입력 2011.10.09 (일) 22:13, 수정 2011.10.10 (월)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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