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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서] <18> 쓰레기 예술

전통 예술작품의 미적 가치에 반기… 무의미 속에서 의미 찾기

“아니 작가라는 작자가 미술관에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갖다 부어 놓질 않았겠어! 아니 쓰레기 같은 작품이 아니고 진짜 쓰레기 말이야.”

◀‘압축된 자전거’(1970년 작, 세자르).

토스카나 피에트라산타에 있는 조각 작업장에서 들어선 노르웨이 조각가 크누트 스텐(87)은 그에게 안부를 묻는 사람들에게 흥분된 목소리로 하소연하듯이 외쳤다. 때는 1980년대 중반. 스텐은 10여 년째 그곳에서 청동과 대리석으로 조각작업을 해오고 있었다. 잠시 런던을 방문했던 그는 현대미술의 동향을 읽기 위해 예술계에서 그 명성과 권위를 자랑하는 테이트 갤러리에 들렀고, 쓰레기 더미가 작품으로 둔갑한 장면을 목격했다고 했다. 스텐은 쓰레기를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작가와 그 작가를 전시한 미술관의 선택에 약이 오른 듯했다.

쓰레기와 폐품이 미술사에 등장한 것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20세기 초반부터였다. 다다이스트들은 예술작품의 미적 가치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의 경제적인 역할까지 거부하며 전통적인 예술가의 역할과 예술관을 근본적으로 전복시키려고 했다. 그런 의도를 가진 그들에게 가장 알맞은 재료로 보인 것은 바로 폐품과 쓰레기였다. 다다 예술가들은 길에서 빈 깡통이나 광고지, 천조각 등을 모아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고, 뒤샹은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작품으로 탈바꿈하고 이론화했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그런 새로운 시도들이 처음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미국 미술잡지에 기고한 한 비평가는 다다이즘이야말로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것 중 가장 병적이고 파괴적인 철학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쓰레기’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하는 경향은 점점 널리 퍼져 1950∼60년대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유행했다.

‘황소 머리’(1943년 작, 파블로 피카소).

1943년 고물상에서 찾아낸 오브제로 황소머리를 만들어낸 피카소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느 날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손에 넣었어요. 안장 위에 손잡이를 얹었더니 황소머리처럼 보였어요. 멋지더라고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니 싫증이 나서 황소머리를 집어 던져버렸어요. 배수로 쪽으로 던진 것 같아요. 어디로 던졌느냐가 중요한 건 아니에요. 내 눈에서 사라지길 바랐을 뿐이죠. 그걸 나중에 지나가던 한 일꾼이 발견해서 꺼내갔어요. 그 황소머리에서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죠. 아마 그렇게 해서 잘 쓰고 있을 거예요. 정말 훌륭하지 않아요? 바로 변형의 예술이잖아요.”

현재 ‘황소머리’ 작품은 파리 피카소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피카소가 싫증이나 버렸다고 하는 부분은 이야기를 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 지어낸 듯하다. 피카소는 ‘황소머리’가 보여주는 우연적 효과와 의미전환에 큰 관심을 보였고, 다른 일화에서도 황소머리 효과를 강조했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우연히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발견하고 “오, 황소가 한 마리 있네”라며 그것들을 함께 들고 다녔더니 보는 사람마다 “이야, 황소다”라고 반겼다고 한다. 그러던 중 자전거를 탄 사람이 지나가며 “어, 자전거 안장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황소머리가 다시 안장과 손잡이로 보이는 것을 경험했다고 썼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피카소가 말한 대로 상황에 따라 의미가 “끝없이 반복될 수 있는 놀이”임에는 틀림이 없다.

◀‘메르츠’(쿠르트 슈비터스). 슈비터스는 상업은행(Kommerz und Privatbank)의 로고에서 이름을 딴 메르츠(merz)라고 지었고 자신의 예술활동 전체를 메르츠라고 불렀다.

폐기물이 작품으로 전복되는 절묘한 이미지. 그 모순적인 상황은 여러 작가들에게 매력으로 느껴졌을 거다. 자전거나 폐차된 자동차 등을 사각으로 압축한 작품을 했던 세자르는 “쓰레기는 버려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필요하면 가져다 쓰라고 거리에 놓여진 것들”이라고 했고, 라우션버그는 “나무와 못, 테러빈유, 유화물감, 천보다 양말 한 켤레가 그림을 만들어내는 데 적절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했다.

볼탄스키는 설치작품에 사용한 헌 옷에 밴 냄새와 주름이 “현재는 부재한 사람들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들이라고 강조했다.

쓰레기를 테이트 갤러리에서 보는 게 크누트 스텐은 그렇게 불쾌했을까. 개념 미술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해 오긴 했지만 그는 동료작가들의 진지한 작업을 폄하할 인물은 아니었다.

사실 작가가 되기 전 젊은 시절의 스텐은 오슬로 환경 위생국에서 말에 수레를 달아 끌고 다니며 쓰레기를 수거하는 일을 했었다. 그는 쓰레기를 줍던 손에서 조각을 하는 손으로 변화한 스스로를 대견해했고, 전통적으로 조각에서 ‘마테리알레 노빌레’(고급 재료)로 일컬어지던 대리석과 청동을 마음껏 만지고 다듬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알고 지냈다. 그는 ‘쓰레기에서 대리석까지’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스텐은 자신이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재료를 고르고 땀을 흘리며 작업하는 대리석과 청동으로 만든 작품이 쓰레기보다 가치가 낮게 평가되는 현실이 난감하고 불쾌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텐은 미술 시스템이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주변으로 밀려난 작가 그룹에 속한다. 비슷한 시기에 피에트라산타에서 작품을 제작했던 작가들 중에도 변화에 재빨리 적응한 작가가 있었지만, 스텐처럼 전통적인 예술 가치를 부여잡고 열심히 작품을 만들다 시대에 떠밀린 작가들도 많았다.

▶‘타블로 다다:세잔의 초상’(카니발지 제1호 삽입 일러스트, 1920년, 프란시스 피카비아, 12.5×16cm). 같은 해 3월에 발간한 391지 제12호에 피카비아는 “예술은 바보천치들을 위한 조제약”이라는 자극적인 글을 남기기도 했다.

경제개념이 뚜렷한 작가들의 적응이 확실히 빨랐다. 영국 작가 배리 플래니건은 토니 크랙 등의 전시를 기획한 토리노의 투치 루소가 전시를 제의했을 때 필요한 작품을 모두 구입한 후 전시를 하라고 말했다. 보통 전시를 해 매매가 이루어지는 작품의 이익을 나누는 방식을 완전히 무시한 경우다.

경제적 상황은 작가의 작품 활동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다다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피카비아는 부유한 환경 덕에 자유롭게 고급 자동차와 아프리카 전통조각 등을 수집할 수 있었고, 전쟁이 터졌을 때는 군에서 탈영해 미국과 유럽을 드나들며 작품활동을 했다.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게으르다는 놀림을 받기도 했던 뒤샹은 작품을 담보로 돈을 빌리거나(빌린 후 갚지 않았다) 후원자의 컬렉션을 완성하는 데 조언을 해주며 당당하게 지원을 받았다. 뒤샹은 집세와 생활비 전액을 지원해줬던 아렌스버그 부부에게 대부분의 작품을 선물했다. 아렌스버그 부부가 컬렉션을 필라델피아 뮤지엄(25년간 컬렉션을 전시하기로 약속)에 기증하는 과정에서도 뒤샹은 큰 역할을 했다. 피카소는 팔리지 않을 법한 작품은 오랜 세월 감춰 두고 때를 기다렸고, 경제적인 위기에 닥쳐서는 화풍을 바꿔 작품의 판매량을 올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앤디 워홀은 잘 팔리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까지 했다.

로버스 휴스는 마약 시장을 제외하면 미술시장이 규제되지 않는 가장 큰 시장이며, 현대미술 작품을 구입하는 데 쏟아지는 금액은 연간 180억 달러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미술 작품은 고유한 정신이나 역사적인 가치 때문이 아니라 높은 이윤을 내주는 좋은 투자의 대상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작품이 분류되고, 비평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높은 가격표 때문에 동경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미술은 지나치게 비싸게 거래되고 있고 “가격이 가진 문화적인 기능이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해 주관적인 비평을 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무제’(2010년 작, 댄 콜린, 츄잉 검, 121.9×91.4cm). 미술계에서 가장 파워 있는 상업갤러리로 손꼽히는 가고시안 갤러리는 ‘쓰레기’를 콜라주한 댄 콜린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로마에서 소개할 계획을 잡았다. 쓰레기 그림이라는 놀림을 미리부터 잠재우려는 듯 그들이 정한 작품전의 제목은 바로 ‘Trash’(쓰레기)이다.

사람들은 길에서 흔히 보는 쓰레기가 미술관에 가득한 것을 볼 때 짜릿함을 느끼고,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작품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움직인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부러움이 섞인 탄성을 지르지만, 문턱이 낮아진 미술관은 미적·예술사적 가치를 정립하는 데 노력하기보다 관람객을 채우기 위해 경쟁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미술관이 가벼운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이나 이미 다른 나라에 유행하는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는 비난도 늘어나고 있다.

스텐은 미술사적인 업적을 세운 작가는 아니다. 생전에도 그러했지만 사후에도 경매시장에서 작품가가 치솟을 일은 없을 거다. 소비를 많이 하는 생활습관과 비용이 많이 드는 작품제작 과정을 선택하는 탓에 노르웨이에서 작품 수요가 꽤 있었음에도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했고, 특정 예술운동에 몸담을 만큼 지식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래서 그의 예술관을 담은 이야기, 그의 무력함이 담긴 불평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고는 생각되지는 않는다.

다양한 예술 장르에 반해 지나치게 단순해진 사람들의 관심사는 예술 전체를 경제가치 하나로 단순화시켜 버릴 위험이 있다. 대형 갤러리와 컬렉터의 전폭적인 지원에 몸값을 올리는 작가들 중에는 예술적 가치에 대한 논란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는 한쪽 눈을 질끈 감은 채 통상적인 전시 리뷰만 쏟아내고 있다. 차라리 순진한 스텐의 불평이 경쾌하게 들릴 정도이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입력 2011.08.07 (일) 21:15, 수정 2011.08.07 (일)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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