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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무게 팍팍 잡던 공공미술… 더 가벼워졌다, 더 재미있어졌다

사옥 등에 설치하는 예술작품, 예술성·엄숙함 보다 이젠 시민과 소통을 더 중시
기업 이미지 바꾸는 마케팅 요소로도 적극 활용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 대표작가로 참여한 미술가 이용백(45)은 지난해 싱가포르계 부동산 투자회사인 아센다스로부터 청계천 인근 시그니쳐 타워에 설치할 공공미술 작품을 의뢰받았다. 이용백은 "처음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패러디한 개념적인 작품을 설치하려 했다. 그런데 의뢰자가 '어렵다. 대중적인 걸로 해 달라'고 해서 결국 흰색 브론즈로 물을 내뿜는 길이 16m의 고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용백의 '알비노 고래'는 지난달 말 설치돼 현재 시험가동 중이다.

▲ 서울 중구 수표동 시그니쳐타워에 설치돼 시험 가동 중인 이용백의‘알비노 고래’. 작가는“처음엔 개념적인 작업을 하려 했지만‘쉽고 대중적인 작품을 해달라’는 의뢰자의 요구 때문에‘고래’로 바꿨다”고 말했다. /이용백 제공

공공미술이 '가볍고 재미있고 쉬워지고' 있다. '건축물미술장식제도(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물을 지을 때 공사비의 1% 이하를 미술품 설치에 사용하도록 한 제도)'가 의무화돼 국내에 공공미술작품 설치가 본격화됐던 1995년 무렵만 해도 유명 작가의 묵직하고 엄숙한 작품을 설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작품 색깔도 흰색·회색 석조작품이나 청동색이 대부분이었다. 그렇지만 작품의 '예술성' '엄숙함'은 대중들에게는 '거리감'과 동의어가 됐다. 1997년 서울 삼성동 포스코 센터 앞에 설치된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Stella·75)의 추상조각 '아마벨'은 작가의 세계적 명성과는 달리 "어렵다" "무섭다"는 대중들의 반응을 듣기도 했다.
 

▲ 너무 엄숙했나… 1997년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센터 앞에 세워진 미국 작가 프랭크 스텔라의 추상조각‘아마벨’. 당시로서는 생경한 외형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한경진 기자

세상은 불과 몇 년 사이 바뀌었다. 공공미술의 기준이 작가의 유명세, 작품의 예술성보다는 관객 친화성 쪽으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는 것이다. 과거 기업들이 법 때문에 의무적으로 작품을 설치했다면, 요즘은 공공미술작품을 자신들의 BI(Brand Identity)를 내세울 수 있는 마케팅 요소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아트 컨설팅 업체 더 톤의 윤태건 대표는 "기업들이 아트 마케팅을 중시하게 되면서, 주변 환경과 어울리고 시민과 소통할 수 있는 작품들이 요즘 공공미술 작품의 대세로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경쾌하고 컬러풀한 작품이 특색인 조각가 김경민의 작품을 대치동 빌딩 앞에 설치한 KT&G측은 "본사 직원 200여명을 대상으로 투표를 한 결과 그 작품이 선정됐다. 민영화 이후 공기업의 고루한 이미지를 벗어버리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상상·젊음·역동성을 기업 이미지 콘셉트로 삼았고, 그 이미지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는 데 중점을 뒀다"고 밝혔다. 시민들의 반응을 건물주가 의식하게 됐고, 그 결과 덜 무겁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대형 건물들 앞에 서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 홍보관 앞에 세워진 이진준의 미디어 작품‘THEY’. /갤러리 정미소 제공

작년 4월 서울 상암동 디지털미디어시티 홍보관 앞 문화공원Ⅱ에는 미디어 아티스트 이진준(37)의 작품 ‘THEY’가 설치됐다. LED 3만2000개로 포옹하고 있는 남녀의 얼굴을 만든 높이 11m의 이 작품은 “‘미디어 작품은 차갑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서정적이고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표현했다”는 이유로 심사위원들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진준은 “작품에 ‘스토리’가 있어서 관람객들의 반응이 좋다고 들었다. 선언적이고 추상적인 작품보다는 이야깃거리가 있는 랜드마크를 조성하는 것이 요즘의 추세”라고 말했다.

서울 신세계백화점 본점 트리니티 가든에 지난 4월 설치된 미국 현대미술가 제프 쿤스(Koons·56)의 ‘세이크리드 하트(Sacred Heart·신성한 마음)’도 마찬가지. 이 작품이 들어오면서 기존에 설치돼 있던 루이즈 부르주아(Bourgeois·1911~ 2010)의 ‘거미’는 다른 곳으로 치워졌다. 세계 미술계의 호평을 받은 작품이지만 ‘거미’는 ‘세이크리드 하트’에 비해 무겁고 어려운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황호경 신세계갤러리 관장은 “새로운 문화적 트렌드를 담고 있고, 고객친화적인 작품을 고민하다가 제프 쿤스를 택했다”고 밝혔다.

‘왜 공공미술인가’(학고재)의 저자 박삼철 서울디자인재단 디자인사업부장은 “예전의 공공미술이 예술가의 아우라를 활용한다는 소극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면, 요즘의 공공미술은 공간 디자인과 공간 커뮤니케이션 요소로 작용한다”면서 “고담준론(高談峻論)하는 작품보다는 관람객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쉽고 편안한 작품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곽아람 기자 aramu@chosun.com

기사입력 : 2011.07.18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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